[경인일보=이성철기자] 한국 경제는 초기 반세기동안 일제 치하의 수탈 위주 경제, 6·25전쟁 등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제자리걸음을 했으나 196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선 이후 '잘살아보자'는 기치 아래 경제개발에 매진해 온 결과, 최빈국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개발, 재벌이 주도하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 등을 통해 우리나라는 지난 53년 6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지난 96년 1만달러를 넘어서면서 선진국의 사교클럽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에 발을 내딛기 시작한 1960년대와 70년대. 대기업들의 비약적인 발전은 대한민국 경제 번영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경기도와 인천. 이곳에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켜온 기업들의 역사가 서려있다.
1960년대 선경(현재 SK케미칼)이 수원에 아세테이트섬유 공장을 세우면서 경기도내 산업 부흥의 시작을 알렸다. 1971년 삼성전자 수원공장이 들어섰고, 1980년대 들어 삼성전자반도체 공장과 정보통신 연구소가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또 많은 협력업체들이 도내 곳곳에 터전을 마련했고 부의 효과는 선순환을 이뤘다.
인천도 마찬가지. 1953년 전후 대한중공업사로 시작해 인천제철로 회사명이 바뀌고 현대에 인수된 후 지금까지 제철공업을 이끌고 있다. 지난 2000년 부도가 나기 전까지 국산 자동차 생산의 전초기지임을 자처했던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 등 고난과 번영의 시기를 거치며 대한민국 산업 역사의 한 면을 장식했다.
# 수원의 대표 기업 선경
선경의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은 1953년 4월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수원시 평동 벌판에서 직기 20대로 선경직물을 창업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 매출 80조원의 재계 3위 기업으로 성장한 SK그룹의 초석을 다졌다.
최 회장은 수원 토박이로 18살 어린 나이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수원공장 견습기사로 일하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1953년 3월에 인수했다.
최 회장은 1953년 10월 1일 회사를 정식 인수하고 '선경직물 창립'을 선포했다.
1968년 12월과 1969년 2월 아세테이트 공장과 폴리에스터 공장이 차례로 완공됐고 이로 인해 선경은 국내 총원사 생산 규모의 26%를 담당하게 된다.
특히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터 원사와 아세테이트 인견사를 동시에 생산해 국내 원사 메이커의 1인자로 도약하게 됐다.
당시 선경직물이 석유정제를 통해 생산하는 원사 사업에 진출한 것은 향후 SK그룹이 석유사업에 진출하는 토대가 됐다.
# 국내 철강기업의 모태, 인천제철(現 현대제철)
현대제철은 1953년 설립된 대한중공업공사에서 비롯됐다.
이 회사는 6·25 전쟁 직후의 폐허속에서 고철을 모아 국토 재건사업을 하던 국내 최초의 철강기업이다.
1962년 '인천중공업'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1964년에는 '인천제철'로 사명을 변경했다.
건설자재를 주로 만들던 인천제철은 30년 전인 1978년 현대그룹에 인수됐다.
인천제철은 당시 국내 재계의 리더인 현대그룹 계열사로 편입되면서 급성장의 길을 걷게 됐다. 투자에 대한 갈증을 현대그룹이 풀어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70년대까지 철근과 일반형강 등 봉형강류에 국한됐던 제품군도 확 늘어났다.
1982년 H형강을 만들기 시작했고 1983년엔 선박의 방향타와 이를 지지해주는 구조물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주단강 제품을 생산했다.
1990년에는 고부가가치 제품인 스테인리스 냉연강판으로 제품 영역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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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삼성전자는 일본 산요전자의 협력을 받아 산요TV를 OEM으로 부품 조립하면서 설립했다. |
# 삼성전자의 태동
1963년 12월 21일. 서울에 소재하던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했다.
이후 1968년 12월 21일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중 서울~수원 구간의 개통이 이뤄졌다. 경부 총구간 425㎞ 중 우선 수원까지 24.8㎞의 도로를 개통한 것은 서울과 수원 이동 시간을 약 20분대로 대폭 단축하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1969년 삼성전자 공장의 수원 유치는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영향을 미쳐 1970년대 수원을 비롯해 경기도의 도시화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됐다.
오늘날 세계 최대 전자업체라 불리는 삼성전자의 뿌리는 바로 경기도 수원이다.
1969년 삼성전자는 일본 산요전자의 협력을 받아 산요TV를 OEM으로 부품 조립하면서 설립했다. 수원시 매탄동 허허벌판에 첫 삽을 뜰 때만 해도 주위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산업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드디어 삼성전자 수원공장이 1970년 11월 4일 착공에 들어간다. 삼성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순간이었다.
삼성은 반도체 사업에도 뛰어든다. 지하수와 전력 공급, 토지 분양 등에서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좋은 평가를 받은 기흥이 공장부지로 선정됐다.
삼성은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한 지 7개월 후인 1983년 9월 기흥공장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나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된 공사 끝에 착공 6개월만인 1984년 3월말 기흥공장이 기적처럼 완공됐다. 국내 반도체 산업의 메카인 기흥밸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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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1973년 11월16일 선경그룹 창업주 최종건 회장 별세. ⑤1973년 12월 19일 GMK(현 GM대우)시보레 버스 광고 . ⑥1990년 9월7일 선경그룹 광고. ⑦2004년 3월 19일 파주 LG필립스 LCD단지 기공식 행사. ⑧2000년 11월9일 대우자동차 최종 부도. |
# 첨단산업의 메카, 파주 LG LCD산업단지
지난 2004년 3월 18일 기공식을 가진 LG필립스 LCD의 파주 LCD 산업단지는 지자체와 중앙정부의 긴밀한 협력으로 대규모 외자 유치에 성공한 모범 사례라는 점 외에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차세대 성장동력인 LCD 부문에서 국내 업체들이 지난해 세계 1, 2위를 차지했지만 대만 업체들로부터 거센 추격을 받는 상황에서 협력 업체와 R&D센터, 국내외 협력업체를 한데 모은 거대한 'LCD 클러스터'를 조성함으로써 시장 주도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지난해 세계 1, 2위 자리를 두고 다퉈온 라이벌 삼성전자와의 경쟁이 2라운드에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도 높았다.
착공 후 10년간 25조원이 투입되는 파주 LG필립스 LCD단지는 총 1천350만㎡에 달해 현재 확정된 LCD 단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LG필립스LCD가 세계 최대 규모의 LCD 클러스터를 파주에 구축하는 이유는 이 지역의 지리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LCD 제품의 수출이 100% 항공편으로 이뤄지는 만큼 인천국제공항과 가까운 입지 조건은 물류비를 기존 구미공장에 비해 현저히 절감할 수 있도록 해주고 또 수도권과 가까워 국제전시장 참여 등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수적인 고급 인력 확보를 위해서도 기존 구미공장에 비해서는 대학이 몰려있는 수도권에 인접한 지역이 유리하다는 판단도 클러스터 입지 선정에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 국산자동차 산업의 견인차,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1955년 시발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국내 자동차 첫 출시. 미군용 지프차의 부품과 엔진, 새시를 만들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들었던 후진국형 조립품이었다.
이후 1960년대에 들어 자동차 회사가 속속 등장하면서 대우의 전신인 '신진자동차회사'가 탄생한다.
1962년 첫 승용차 모델인 새나라자동차가 부평공장에서 첫 출시.
신진자동차는 1972년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인 'GM'과의 합작생산을 시작으로 'GMK'는 엄청난 도약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GM의 막강한 후원에도 불구하고 원가 부담과 로열티를 견디지 못한 GMK는 1976년 산업은행에 소유권을 넘기면서 '새한자동차'로 거듭난다.
새한자동차의 사장으로 취임한 김우중 씨가 1982년 회사명을 대우자동차로 변경하고 2001년 GM사에 매각되기까지 국산 자동차 기업의 맏형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