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최규원기자]흔히들 주름을 나잇살이라고 한다.
주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고의 세월을 거쳐왔다는 것이고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은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름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름의 아름다움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현상만 바라보는 우리네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름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이를 꼽는다면 전세계가 존경해 마지않는 '테레사 수녀'가 있을 것이다.
날개 없는 천사로도 불리는 테레사 수녀의 골이 깊게 팬 주름을 보고 나면 왠지 모를 숙연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테레사 수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주름이 아름다운 날개없는 천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30년 넘게 장애인과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그림자처럼 도움을 준 김형옥(80) 할머니가 그러한 사람 중 하나다.
개성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교사로 재직하던 중 전쟁이 터지면서 가족을 모두 고향에 둔채 학교 선생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란을 왔다.
혈혈단신 고단한 삶이었지만,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모든 사랑을 줬고 열심히 행복을 가르쳤다.

그리고 30여년전 정년 퇴직한 이후에는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삶을 선택했다. 지인의 권유로 대한적십자사를 방문한 것이 그 계기가 됐다.
교직시절, 먹고 살기 힘들어 도시락을 못 가지고 오는 제자에게 남몰래 육성회비(당시 후원회비) 등을 챙겨줬던 그 마음이 학생이 아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김 할머니는 우리나라 나이로 80세다. 나이탓일까. 어느덧 같이 활동하던 자원봉사자들은 물론 자신이 조금씩 도움을 줬던 이들도 이미 '좋은 세상'에 먼저 간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을 생각하는 김 할머니의 활동은 여느 50~60대 못지 않게 왕성하다.
지금껏 봉사활동을 하면서 장애인들 특히 아이들과 함께 할 때가 가장 뿌듯했다는 김 할머니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주변 또래아이들에게 항상 이유없이 미움받고, 남과 다르다며 놀림거리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언제나 의기소침해 있다"며 "그러나 봉사원들과 함께 소풍이라도 가 함께 뛰어놀고 나면 아이들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남의 눈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얼굴 빛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고 말한다.
지금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놀던 모습만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려오면서도 고마워지는 건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 때문이라고 말하는 김 할머니. 살며시 웃고 있는 김 할머니의 얼굴에 팬 주름에는 '행복', '기쁨', '사랑', '나눔'이 배어나오는 듯하다.
30여년간 장애인과 이웃돕기에 적극적이었던 탓일까. 김 할머니의 제자들도 어느 덧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스승의 교육(?) 탓일까 남을 돕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손발을 걷고 뛰어든다. 한 제자는 강원도에서 사회복지사업으로 저소득 대상 급식 지원 및 재가노인에게 점심을 제공키 위한 시설을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가끔 이 제자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며 '회포'를 풀기도 한다.
이처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김 할머니의 활동영역에도 불구하고 김 할머니를 아는 수혜자는 많지 않다. 그저 말동무만으로 고마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는 것조차 싫어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굳이 만나길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우렁각시처럼 보이지 않게 '그림자'처럼 시나브로 도움을 준다.
봉사활동을 하다보면 시간 가는 것을 못 느낀다는 김 할머니는 요즘도 1주일에 2~3일은 반드시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지금껏 그렇게 봉사한 시간만 2만시간. 이는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일할 경우 2년3개월에 이르는 시간이다. 여느 사람들은 60평생 살면서 가족을 제외하고 몇시간을 남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살까?
김 할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그 나이에 무슨 봉사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김 할머니는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하신단다. 지금까지 봉사를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고 건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봉사)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건네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에 되레 '(내가 더)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건넨단다.
자식과 손자·손녀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치고 그 실천을 보여줘 온 탓일까. 가족들도 이제는 봉사가 삶의 일부가 돼버렸다. 한때 김 할머니처럼 교직생활에 몸 담았던 딸도 현재 성남에서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상담을 진행하고 있고, 이제 24살 된 손자와 27살 된 손녀도 봉사밖에 모른다. 내가 남에게 무엇을 받기보다 남에게 도움이 되려는 할머니의 삶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밴 것이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마음'만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내가 준 것보다 더 많은 무언가가 되돌아온다는 '진리'를 깨우쳤기 때문이리라.
'봉사활동이 가장 좋은 노후'라고 말하는 김 할머니는 "사람들은 봉사활동이 남을 위한 삶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봉사활동의 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며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이고,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기쁨, 행복,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삶을 더 살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라며 '봉사'는 '덕'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은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 말은 김 할머니 삶의 원동력일 것이다. 자신은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작은 '보탬'을 미소로 받아들이며 자신 스스로가 더 감사함을 느낀다는 김 할머니.
80평생 삶의 이야기를 깊은 주름과 미소에 모두 담고 있는 김 할머니. 언뜻 김 할머니의 얼굴에서 테레사 수녀의 얼굴이 스치는 것은 아마도 남을 먼저 생각하고 다가가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가득 하기 때문이리라. 주름이 깊게 팬 김 할머니를 얼핏 스치는 사람이라면 그저 나이 많은 할머니라고 생각하겠지만, 할머니의 삶을 알고 나눔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그 깊은 주름의 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