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김종화기자]"야구 속에 인생이 있고 삶이 있다."
프로야구 SK 김성근(68) 감독이 인터뷰 시작과 함께 한 말이다.
냉혹한 프로야구의 세계에서 27년째 사령탑을 맡고 있는 김성근 감독은 현역 최고 명장으로 손꼽힌다. 1982년에 리그를 창단해 30년이 채 안된 한국프로야구사를 통틀어 김성근 감독과 함께 어깨를 견줄만한 명장은 현 삼성야구단 사장을 맡고 있는 김응용씨와 국민감독으로 명성이 높은 김인식 전 한화 감독뿐이다.
김 감독의 별명 '야신(野神)'은 김응용 사장이 붙여줬다.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삼성이 '우승청부사'로 해태에서 영입했던 김응용 감독이 마침내 우승, 삼성의 21년 묵은 한을 풀었지만 당시 김성근 감독이 이끌던 LG에 6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한 것이었다. 우승후 방송인터뷰에서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은 '야구의 신'"이라고 말한데서 유래됐다.

지난 2007년 SK 감독을 맡기 전까지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김 감독은 SK 사령탑 첫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김 감독이 야구인들과 야구팬들에게 존경받는 것은 한국시리즈 4회 연속 진출과 3번 우승이라는 성적 때문만은 아니다.
"야구 속에 인생이 있고 삶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야구를 통해 희망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김성근 감독은 부모님이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재일교포 2세들이 그렇듯 그도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어렸을 때 워낙 가난해서 아침에 일어나면 모두 일을 나가고 혼자였다. 그래서 부모님이나 형제들의 간섭도 없었지만 누구에게 의존할 형편도 아니었다"고 말을 꺼냈다.
그는 "가난해서 도시락에 간장을 뿌려 학교에 가면 일본 애들이 놀렸고 '이지메'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었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버티며 뭔가 잘해야겠다는 욕망이 생긴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의 자서전과 리더십 책들에는 그의 힘들었던 청소년 시절이 잘 적혀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묻자 공과 방망이가 없어서 집 앞의 강가에서 나무를 방망이 삼아, 돌멩이를 공 삼아서 펑고와 피칭 훈련을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귀띔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음식 '스시'도 그는 스물두살이 되어 처음 먹어봤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했다.
김 감독에게 야구는 절실했다. 힘들었던 시절 야구는 그에게 목표였고 목표를 위해 달려가며 행복을 느끼게 해줬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김 감독에게 '야구가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이라는 곳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지냈던 김 감독과 한국과의 인연은 1959년 8월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선수자격으로 고국을 방문하면서부터다. 당시 재일교포들에게 한국은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라는 인식이 컸고 김 감독도 가족들의 만류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야구를 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을 방문했고, 당시 야구 열기에 놀랐다. 이것이 인연이 돼 김 감독은 동아대 야구부 입단 제의를 받았고 영구 귀국했다.
그의 순탄하지 않았던 인생은 한국에서도 계속됐다.
실업선수시절에는 강속구 좌투수였지만 어깨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일찍 접어야 했고, 충암고와 신일고를 비롯해 1984년 프로야구 OB(현 두산) 감독을 시작으로 태평양(89~90년), 삼성(91~92년), 쌍방울(96~99년), LG(2001~2002년)의 사령탑을 맡았다. 이를 거치면서 그에게는 항상 '강하다', '프런트와 갈등이 많다', '훈련을 많이 시킨다' 등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야구계에서는 2002년 LG를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켜 2위라는 성적을 내고도 재계약에 실패했던 사건을 두고 김 감독의 강인한 성품과 자율야구를 표방했던 구단측과의 갈등의 산물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김 감독은 당시를 생각하면 리더의 결단력이 조직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은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김 감독은 "경기의 결과는 감독이 책임지는 거다. 1년 동안 우승만을 목표로 고된 훈련을 이겨내고 정상 문턱에서 돌어서야 하는 선수들을 봤을 때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그 순간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강인한 성품 덕에 야구계의 발전에도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그 한 예가 84년 OB감독을 맡으며 2군 제도를 정착시킨 점과 투수의 분업화 등을 꼽는다.
김 감독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말이 '적재적소'(適材適所)와 '일구이무'(一球二無)다.
그는 "적재적소는 선수단 상황이 어려웠던 쌍방울의 사령탑을 맡으며 나온 말이다"며 "사람들은 내가 투수를 자주 바꾼다고 말이 많지만 선수들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선수기용이다. 당시 배운 거다. '적재적소'는 전력의 극대화다. 없는 자원을 가지고 최대한의 효과를 내기 위해 생각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 김 감독은 "이 순간은 한 번 밖에 없다. 오늘 아니면 내일 하면 되지, 그거는 도망가는 거다. 일구이무는 현재에 충실하자는 거다"고 설명한 후 "나는 인생의 성공자는 시행착오가 많은 사람 중에 나온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주문한다"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내 야구를 보고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배운다는 팬들도 많다. 힘든 고비를 이겨 내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야구경기는 인생에서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팬이 있기에 프로야구도 있는 거다. 선수들이나 구단은 팬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또 경기장을 찾는 팬들을 위해 최선의 경기를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 후 "SK 사령탑 이후를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야구계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을 거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