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탕산(唐山) 준화시(遵化市)에 위치해 있는 청동릉(淸東陵)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능묘군이다. 그런데 교통편이 안좋고 편의시설이 발달돼 있지 않은 탓에 관광객들의 발길은 뜸한 편이다. 베이징 시내에서 차로 125㎞ 정도 동쪽으로 달리다보면 갖가지 난관을 만나게 된다. 고속도로는 어느새 2차선 지방도로로 바뀌며 대형트럭, 삼륜차, 우마차, 자전거가 함께 달리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좁은 도로와 산을 굽이굽이 돌아 승용차로 3시간여만에 도착한 청동릉. 막상 능 입구에 도착해보니 그 끝이 도무지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지경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능원의 총 면적은 2천500㎢로 이곳엔 청대 5명의 황제와 15명의 황후, 비빈(妃嬪)·왕자·공주를 포함해 총 161명이 묻혀 있으며 300개 이상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대규모로 조성된 청동릉은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 청나라 황릉이 동서로 분리된 까닭
청대의 황릉은 크게 세군데로 분리돼 있다. 청태조 누르하치와 2대 황제(태종) 홍타이지는 만주족의 근거지였던 선양(瀋陽)을 수도로 삼고 청(淸)의 기틀을 만들었지만, 통일된 중화제국을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운명해 선양에 묻혔다. 그후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인 3대 황제 순치제 (順治帝·1638~1661)는 이들의 뒤를 이어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대부분 평정하고, 1644년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있는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을 통해 베이징(北京)에 입성, 수도를 베이징으로 바꾸게 된다. 명대에 이어 베이징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순치제는 1661년 베이징 동쪽에 있는 준화(遵化) 지역에 묻히게 되고, 이것이 청동릉의 시초가 된다. 나머지 왕들도 순치제를 따라 청동릉에 묻혔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순치제의 손자인 옹정제(雍正帝·1678~ 1735)는 이곳이 아닌 베이징 서쪽의 역현(易縣)에 별도로 자신의 능을 만든다. 이것을 '청서릉(淸西陵)'이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풍수(風水) 때문이었다. 옹정제는 황제로 즉위한 후 청동릉에 조성될 자신의 능을 답사한 후 "비록 규모는 크지만 형국이 완전하지 못하다. 혈(穴)자리의 흙에 진흙이 묻어 나와 쓸수가 없다"라며 불만스러워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천문지리에 정통한 풍수가들을 동원해 만년 길지를 찾아 헤매였으며, 마침내 바오딩시(保定市) 역현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한다.
이렇게 해서 청나라 황릉은 수도 베이징을 기준으로 동서로 양립되는 국면이 나타나게 됐고, 후대의 황제들은 순치제를 따라 청동릉에 능을 만들지, 아니면 옹정제를 따라 청서릉에 무덤을 조성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 재위 순서대로 동쪽(청동릉)에 한명, 서쪽(청서릉)에 한명씩 교대로 능을 조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 황제들의 매장 순서는 꼭 이런 원칙과 일치하지 않아 일반인들은 어느 황제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구분하기 쉽지 않게 됐다.
정리해보면 청동릉에는 순치제(順治帝·3대), 강희제(康熙帝·4대), 건륭제(乾隆帝·6대), 함풍제(咸豊帝·9대), 동치제(同治帝·10대), 서태후(함풍제의 후궁)가 묻혔으며, 청서릉에는 옹정제(雍正帝·5대), 가경제(嘉慶帝·7대), 도광제(道光帝·8대), 광서제(光緖帝·11대)가 잠들어 있다.

#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넘어 강희·건륭시대를 맞다
청나라는 순치제의 셋째 아들인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1654~1722)에 이르러 안정기에 접어든다. 강희제는 당시 반청세력이 일으킨 삼번의 난(三藩之亂·1673∼1681)을 완전히 진압하고, 대만을 복속시켜 진정한 중국의 통일을 달성했다. 그는 또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해 1689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해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하고, 북방 몽골지역을 평정해 국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군대에 대한 통솔력과 강력한 카리스마, 황권을 조절하고 한족(漢族)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했던 강희제는 중국 역대 300여명의 황제 가운데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강희제에 이어 5대 옹정제(雍正帝·1678~1735), 6대 건륭제(乾隆帝·1711~1799) 3대로 이어지는 '강희·건륭'시대는 청의 전성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중국은 이 무렵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다. 성조 강희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래 세종 옹정제, 고종 건륭제의 3대 130여 년 동안 중국은 사회가 안정되고 인구도 늘어났으며, 영토 개척으로 청대의 전성시대를 이뤘다. 중국 역사에서 이 시기는 한(漢)·당(唐)나라의 전성기와 비교될 수 있다. 청동릉에는 이렇게 청나라의 부흥기를 이끈 강희제와 건륭제는 물론 '철의 여인'으로 불리며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서태후까지 안장돼 있기에 그 규모나 건축의 정교함에 있어서 다른 능들을 훨씬 압도한다.

# 풍수문화·건축의 백미 '청동릉'
청동릉의 능묘 구역 전체는 창서산(昌瑞山)과 이어진 명나라때의 완리창청(萬里長城)을 경계로 하고 있으며, 능침을 건설할 때 풍수지맥이 막히지 않도록 산의 정상부에 있는 완리창청 일부(10㎞가량)를 없애 버릴 만큼 풍수를 중시한 곳이다. 창서산 정상에 올라가면 남쪽의 '전권(前圈)'이라 불리는 능묘 지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초목은 무성하고 붉은 담과 금색 지붕이 조화를 이루며 휘황찬란한 위용을 드러낸다.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 빽빽하게 수목이 들어서 있는 '후룡(後龍)'이 보인다. 비록 옹정제는 이곳을 거부했지만 이 웅장하고 빼어난 봉우리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드넓은 대지에 조성된 건물들은 수려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청동릉에는 순치제의 효릉(孝陵)이 가장 먼저 들어섰기에 가장 큰 규모로 조성됐으며 창서산 주봉(主峰)의 남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나머지 황릉들은 효릉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정렬돼 있다. 청동릉의 초입에 들어서면 대형 석조 건축물인 석패방(石牌坊), 대홍문(大紅門), 순치제의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가 들어있는 대비루(大碑樓)가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 길이 5.6㎞, 폭 12m나 되는 효릉의 신로(神路)는 청동릉의 주신로(主神路)로 사용되며 사자, 해태, 낙타, 코끼리, 기린(麒麟), 말 등의 석상생(石像生·석물) 18쌍과 3쌍의 문·무인석이 300년이 지난 지금도 끄떡없이 서 있다. 이 신로는 나머지 능들의 신로와 T자 형태로 연결돼 있어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효릉에서 동쪽으로 1㎞ 떨어져 있는 경릉(景陵)에는 강희제와 4명의 후궁, 1명의 황귀비가 묻혀 있다. 1676년 건설이 시작돼 1681년 완공이 됐으며 건축 규모는 효릉보다는 약간 작지만 건축 구조나 조성은 거의 같다. 그리고 후대 청 황릉의 독특한 구조도 함께 담고 있다.

건륭제와 2명의 황후, 3명의 황귀비가 안장된 유릉(裕陵)은 효릉에서 서쪽으로 1㎞ 떨어져 있다. 유릉이 건설되기 시작한 1743년은 청나라가 가장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부를 축적하고 있을 시기여서 황릉의 조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유릉의 면적은 46만㎡가 넘는다. 건설기간만 14년이 걸렸으며, 능 건설에 백은(白銀) 203만냥이 소요됐다.
이렇듯 청동릉은 사람들에게 '사후의 자금성'이라 불리며 청나라의 풍수문화와 건축 실력의 백미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곳이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능이 후대의 도굴꾼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비운을 겪게 되는데, 이곳에 묻힌 황제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다음회에 계속).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