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조성면(문학평론가·인하대 강의교수)]기차와 자동차는 여러 면에서 곧잘 대비되곤 한다. 교통의 한일전이라고 할까. 철도가 증기를 바탕으로 한 석탄문명의 총아였다면, 자동차는 내연기관을 바탕으로 한 석유문명의 결정체다. 기차가 하드웨어와 역사성과 안정감에서 앞선다면, 자동차는 소프트웨어와 유연성과 편리성에서 기차를 추월한다. 자동차가 기차를 따돌리고 앞서나가는가 했더니, 곧이어 고속전철과 자기부상열차가 등장하여 자동차를 맹렬히 추격한다. 철도와 자동차는 이렇게 드라마틱한 경쟁관계를 이루면서 현대문명의 발(足)로 그 역할을 다해 왔다. 부평은 이런 곳이다. 기차의 도시이며, 자동차의 도시라는 것―즉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상지이며, 인천지하철과 교차하는 경인선의 결절점이라는 점이다.
기차의 등장으로 이룩된 근대공업도시 부평이 석유문명의 결정체인 자동차산업의 산실이 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첫 번째 국산 자동차인 시발자동차의 뒤를 이어 현대적인 생산라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승용차인 새나라가 출시된 곳이 바로 부평이다. 비록 설립 1년 만인 1963년에 문을 닫았지만, 부평은 새나라자동차에서 신진·GM코리아·새한·GM대우로 이어지는 한국자동차산업의 발상지라는 역사를 열게 되었다.
세상만사 얽히고설켜 돌아가듯 결과가 좋다고 해서 기원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위대한 삶을 살다 간 문인이라고 해서 작품도 저절로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부평이 근대공업 내지 자동차산업의 원조가 된 역사는 그리 탐탁하지 않다. 서울과 인천의 사이에 위치한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특성에 주목한 일제가 부평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군사산업도시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939년에 설립된 일본 육군조병창이 바로 그러하다. 오늘날 부평1동의 아파트 단지와 산곡동의 미군부대 그리고 화랑농장 일대가 바로 조병창이었다.
그리고 조병창보다 꼭 2년 앞선 1937년 일본의 군용차 생산을 위한 자동차조립공장도 이미 들어서 있었다. 이를 계기로 초창기 한국 자동차산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경성 모터스·중앙 모터스·대동모터스 등 자동차 서비스 공장이 부평에 들어서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부평은 자동차의 도시로 도약하게 된다.
재생 승용차 신성호로 주목받은 신진은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한 다음, 1965년 5월 도요타와 기술제휴를 하고 부평공장에서 조립 생산한 자동차를 내보내니 그것이 바로 코로나다. 코로나의 영광은 5년을 넘지 못했다. 기술제휴사인 토요타가 계약 연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승용차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매우 높아졌다. 이후, 크라운·퍼블리카·코티나·시보레·브리사 등등 상류층을 중심으로 신차 개발의 퍼레이드가 줄을 이었고 고도성장에 힘입어 곧이어 마이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기지가 들어섰어도 또 자동차 산업의 질주가 지속됐어도 경인선은 책임감 하나로 묵묵히 가족들을 건사해 왔던 우리시대의 아버지들처럼 시민들의 발로써 자기소임을 다하며 쉼 없이 달려왔다.
경인선의 네 번째 정차역 부평. 격동의 부평사 역시 단 네 단어로 요약된다. 조병창·자동차·경인공단·푸른색 작업복! 1980년대 초 노동현장을 누볐던 이세기(49) 시인은 조병창으로 시작해서 자동차산업과 경인산업단지로 발전해 온 현대사는 잘 알려져 있지만, 부평이 블루진의 도시 즉 작업복으로 개발한 푸른색 기성복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진짜 한국식 청바지인 푸른색 작업복과 가난한 노동자들의 살림살이의 상징 간이옷장 차단스(チァダンス)야말로 거침없이 질주해 왔던 지난 개발시대의 표상이며, 어쩌면 가장 부평다운 인간의 문화요 부평의 문화였노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의 말대로 부평은 단지 인천의 종속사가 아닌 독자적인 지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부평은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으나 경인 전철의 거점이 되는 환승역이 있을 만큼 중요한 곳이며 유구한 역사가 전해 내려온다. 일제강점기 부천군과 인천부로 분할되는 변동을 겪었으나 원래 부평은 왕이나 부족장처럼 높은 사람이 사는 땅이라는 뜻을 지닌 주부토군(主夫吐郡)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안남도호부가,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가 들어섰을 만큼 규모도 컸다. 부평도호부 청사·어사대·욕은지의 존재는 그러한 부평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역사 유적이다.
부평의 위상에 변화가 생긴 것은 경인선이 부설되면서이다. 한국 근대 도시들은 철도의 등장에 따라 극심한 부침을 겪는다. 한밭(대전)이라는 소지명(마을이름)으로 통칭되던 작은 자연부락이 경부선 역이 건설되면서 광역시 급의 대지명으로 발달하는가 하면, 대전(한밭)을 거느렸던 회덕군이 점점 쇠퇴하여 오히려 동으로 대전에 편입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두세 개의 지명이 절취, 조합되어 새로운 지명으로 소멸 혹은 확장되기도 한다. 강릉과 원주의 이니셜을 딴 강원도, 전주와 나주의 전라도, 충주와 청주의 충청도, 경주와 상주의 경상도 등등이 그러하다. 부평은 중지명이었다가 소지명으로 다시 중지명으로 역사를 이어왔던 것이다.
한국 중세도시의 구성원리였던 좌묘유사(左廟右社)·배산임수 등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아도 부평의 진산(鎭山)인 계양산의 존재는 이 도시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진산이란 각 고을이나 도읍의 거처가 되는 주산을 말하며, 대개 이런 곳에는 산성이 들어서게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산이 많은 우리 민족은 주요 거점에 산성을 쌓고 적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키고 예봉을 약화시키는 농성전, 이른바 종심방어(縱深防禦)를 주요 전략으로 채택해 왔다. 이곳에 산성이 들어선 것은 한강과 굴포천을 통해서 자주 침탈해 들어왔던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특히, 경기만을 거쳐 서울로 가는 거점에 자리하고 있으니 부평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이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발발한 원통이고개전투는 부평의 위상과 지정학을 대변하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제는 부평(富平)이란 그 이름 그대로 영원히 복되고 평화롭기를!
사진┃김범준기자 bjk@kyeongin.com·'격동한세기 인천이야기'(다인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