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세계 열강들의 군사적·경제적 침략과 농민들의 저항, 시민의 성장 등으로 점차 쇠퇴의 길을 가고 있던 청나라는 서태후(西太后)라는 한 여인에 의해 되돌릴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된다. 어린 황제들을 대신해 48년간 수렴청정을 하면서 그 어떤 황제 부럽지 않은 큰 권력을 행사했던 그는 신식 해군을 만들기 위한 국가예산을 자신의 별장인 '이화원(頤和園)'을 짓는 데 다 써버리는 등 사치와 낭비가 심했다. 결국 서태후의 통 큰 낭비 덕분에 청나라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276년간 이어져 왔던 청황조는 1912년 쑨원(孫文)의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 역사의 라이벌, '동태후(東太后)'와 '서태후(西太后)'
청나라 제9대 황제인 함풍제(咸豊帝·1831~61)에게는 3명의 황후와 1명의 황귀비가 있었다. 첫 번째 부인인 효덕현황후(孝德顯皇后)는 함풍제가 재위에 오르기 2년 전 죽었고, 두 번째 부인인 효정현황후(孝貞顯皇后)와 세 번째 부인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는 권력을 앞에 두고 힘겨루기를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효정현황후의 휘호는 '자안(慈安)'이고 효흠현황후는 '자희(慈禧)'인데 자안은 자금성 내정(內廷)의 동편에 있는 종수궁(種粹宮)에서 생활했고, 자희는 서쪽에 있는 저수궁(儲秀宮)과 장춘궁(長春宮)에서 머물렀다. 그래서 흔희 자안을 '동태후(東太后)', 자희를 '서태후(西太后)'라고 부르는 것이다.

# 명·청 황릉 중 가장 화려한 자희릉(慈禧陵)
청 문종(文宗) 함풍제는 1865년 허베이성 준화시(遵化市)에 있는 청동릉(淸東陵)의 왼쪽 끝 '정릉(定陵)' 지하궁에 안치됐다. 그리고 함풍제의 부인이었던 자안, 자희 양 태후의 능은 함풍제의 능 동쪽에 위치해 있다. 정릉의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자안릉(慈安陵)과 자희릉(慈禧陵)을 합쳐 '정동릉(定東陵)'이라 부른다. 정동릉은 1872년 착공돼 1879년 완공됐다. 자안릉 건설에는 은(銀) 266만 5천냥, 자희릉에는 227만냥이란 거금이 들었다. 이 두 능침은 건축 구조가 동일하며 면적도 2천265㎡로 똑같다. 그러나 자희는 능원 건설에 불만이 많았다. 자안이 생전에 자희보다 서열이 높았기 때문에 자안의 능침은 함풍제의 정릉에 더 가까이 배치돼 있고, 자희의 능은 상대적으로 정릉과 더 떨어지게 됐다. 이런 점을 보상이라도 하듯 자희는 자안이 서거하자마자 광적으로 자신의 능묘 재건에 매달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모으라고 명령한다.
1895년 정식으로 자희릉(보타욕 정동릉이라고도 부름)이 재건되기 시작됐다. 자희는 융은전(隆恩殿) 앞에 있는 단폐석(丹陛石)부터 바꾸라고 지시했다. 원래 단폐석에는 용이 위에 있고 그 아래 봉황이 들어간 '용봉희주(龍鳳戱珠)'라는 문양이 들어가는데, 그는 봉황을 위로 가게 하고 용을 밑으로 가게 문양을 바꾸라고 지시한 것이다. 봉황은 자신을 의미하며 용은 황제를 의미하는데, 황제보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자신의 지위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배전 내부의 대들보나 문, 창틀 등은 모두 최고급인 황화이목(黃花利木)을 사용했고, 융은전 안에 있는 4개의 명주(明柱·밖으로 노출된 기둥)에는 연화무늬와 용이 몸을 틀어 구름으로 날아오르는 형상을 새겨 넣고 금을 입혔다. 대전 세 군데엔 특수제작된 벽돌을 이용해 황색, 청백색의 찬란한 빛깔을 띠게 했다. 건물의 규모를 마음대로 늘릴 수 없었던 만큼 내부를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했던 것이다. 자희릉은 서태후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비로소 완공됐다. 재건을 시작한 지 14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전체적인 건축 수준이나 공예기술, 그 화려함으로 볼 때 자희릉은 명과 청 두 왕조 24대 황제, 황후의 능침 가운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 도굴꾼들에 의해 짓밟힌 청동릉(淸東陵)
1908년 10월 22일 자금성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침내 대청 제국을 근 반세기 동안 좌지우지하던 철혈여인, 73세의 자희 황태후가 서원(西苑) 의란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것이다.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등극한 지 채 3년도 되지 않은 신해년(1911)에 이르러 대청제국은 남방의 혁명당에 의해 조종(弔鐘)을 울리고 말았다. 이후 10년 동안 군벌들에 의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된다. 군벌(軍閥)이란 독립된 군대를 갖고 한 지역을 차지해 독립적 통치권을 행사했던 군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국가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열강인 제국주의 세력과도 야합해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했으며, 모든 문제의 해결을 군사력에 의존했다.
군벌 출신으로 국민혁명군에 귀순했던 손전영(孫殿英)은 군자금을 마련하느라 고심하던 중 우연히 도굴꾼들로부터 청동릉에서 금은보화를 훔쳐 돈을 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도 한번 도굴을 하기로 결심한다. 1928년 7월의 어느 야밤. 손전영은 군사훈련을 구실로 무장한 채 청동릉으로 쳐들어가 3일 밤낮에 걸쳐 건륭제의 유릉(裕陵)과 자희 황태후의 능묘를 폭탄으로 파괴하고 지하궁을 찾아내 부장품을 약탈했다.

수십여명의 병사들은 서태후의 관곽(棺槨)을 칼과 도끼로 부수고 그 안에 있던 금사 구룡관, 한 무더기의 비취, 옥불, 금불, 다이아몬드, 18알 진주를 꺼냈다. 그리고 서태후 시신의 입을 칼로 째고 입속에 넣어 두었던 야광주도 꺼냈다. 야광주는 입에 물고 있으면 시체가 영원히 썩지 않아 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 된다는 전설 속의 보물이었다. 병사들은 또, 서태후가 입고 있던 옷은 모두 벗겨버린 채 시신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 청나라 최강의 황제였던 건륭제의 '유릉'을 찾아 똑같은 만행을 저지른다. 청동릉의 도굴은 3일 밤낮으로 계속된 후에야 끝을 맺었다. 손전영 부대는 차량 30대에 달하는 보물을 획득한 후 사라져 버렸다.
청동릉의 도굴 사건이 발생한 지 이제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파괴된 전각과 황무지나 다를 바 없었던 능원도 이제는 수리되고 새롭게 단장돼 정식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하지만 아직도 서태후의 능침 일부에서는 도굴사건 때 파괴됐던 흔적이 드러난다. 화려한 서태후의 부장품들이 능 안에 그대로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관광객들이 청동릉을 방문하며 감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생을 생각하며 금은보화와 야광주까지 물고 저 세상으로 갔던 그녀가 사후에 그런 모욕을 당한 것도 결국은 백성들을 등한시하고 향락을 누렸던 그녀의 업보가 아닌가 한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