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득황제의 비석이 들어있는 나비아(Nha bia·碑亭). 명·청황릉의 신공성덕비정(神功聖德碑亭) 모양에 서양건축 스타일을 결합해 독특한 디자인을 보여준다. 비정 안에 있는 기둥에는 용이 승천하는 문양을 그려놓았으며, 베트남에서 가장 큰 규모의 비석에는 뜨득황제가 본인의 일생을 한자로 새겨놨다.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한국과 베트남은 오랫동안 중국과 접해 있으면서 중국으로부터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사회·문화적으로 상당히 비슷한 면모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충효사상, 사농공상, 과거제도, 관혼상제, 풍수지리, 24절기와 십간십이지의 사용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는 우리와 다른 기나긴 '식민역사'가 있다. 베트남의 고대사 전체는 중국의 식민지 시대였으며, 독립한 이후에도 수차례 중국의 침략을 받아 재식민지가 됐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에는 제국주의 프랑스가 베트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베트남의 근대사는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Nguyen·阮王朝)는 현재의 베트남 영토 형태로 전국을 통합한 최초의 왕조이지만, 프랑스에 주권을 빼앗겨 대중으로부터 가장 비판받는 왕조가 됐다.

▲ 뜨득 황제(Tu Duc·1829~1883)

#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 '후에'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후에(Hue)'는 흐엉강(香江) 하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중국해와 매우 가깝다. 수도 하노이와는 540㎞, 베트남 최대 도시인 호찌민시와는 644㎞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베트남은 역사·문화적으로 북부와 남부가 서로 별개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데, 남과 북을 가르는 기준점이 바로 후에인 것이다. 후에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수도로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40여년간 응우옌 왕조의 정치·문화적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1802년 '응우옌 푹 아잉(Nguyen Phuoc Anh·嘉隆帝)'은 프랑스의 협력을 얻어 응우옌 왕조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됐다. 하지만 외세를 이용해 세운 왕조이기 때문에 이후 여러 나라의 국정 간섭에 시달렸고, 결국 1883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후에에 있는 병원, 역, 학교 등 유럽 양식으로 된 근대적인 건물들은 바로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다.

한편 후에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응우옌 왕조 13대에 걸친 황제들이 잠든 황릉이다.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은 생전에 거주했던 궁정을 능가하는 화려한 능을 제작했고, 건축 양식은 중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각 능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후에에 있는 황궁과 사원, 황릉과 오래된 건축물들은 유네스코에 의해 '후에 기념물 집중지대(Complex of Hue Monuments)'라는 이름으로 1993년 베트남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 석관형태로 돼 있는 뜨득황제의 무덤.

# 화려하지만 고독했던 '뜨득황제'

후에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5㎞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뜨득황제(Tu Duc·4대)의 능은 민망황제(Minh Mang·2대)의 능과 함께 후에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대한 능으로 꼽힌다. 이곳의 주인인 뜨득(1829~1883) 황제는 응우옌 왕조 13명의 황제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35년간을 통치했던 인물이다. 그는 1864년부터 1867년까지 만 3년에 걸쳐 3천여명의 인원을 투입해 능을 완성한 뒤, 별장과 같은 이곳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50명의 요리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50종류의 요리를 50명의 하인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나 연못 위에 떠있는 연꽃 잎에 밤새 맺힌 이슬을 모아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 100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내용 등으로 볼때 그의 화려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 뜨득황제가 살아 생전 즐겨 찾았던 루키엠(Luu Khiem) 연못과 쑹키엠(Xung Khiem) 정자.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생활만을 즐겼던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뜨득의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몸이 작고 허약한데다 의지가 박약했던 그는 정치보다는 그림을 그리거나 시 쓰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연히 나랏일에 무관심한 황제때문에 국민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자연재해, 기근, 공직자들의 착취와 힘있는 영주들로 인해 나라는 점점 기울어져 갔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 결국은 프랑스의 베트남 합병을 가져오게 된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뜨득황제의 현실 도피적인 성향은 점점 더 커졌다. 그는 궁녀, 내시, 궁중악사들과 함께 연못 위에 배를 띄워놓고 밤새도록 가락을 즐기며 끊임없이 자조적인 시(詩)만 써댔다. 사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어 됐던게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황위를 물려줄 때 권력 욕심이 지나쳤던 뜨득의 형 대신 그를 황제에 앉혔던 것인데, 문예적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난데다 유교와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정치에 적성이 맞을리가 없었다. 더구나 본격적으로 집권했을 땐 가족이 다 죽어 그 곁에 아무도 없었고, 황후와 100명이 넘는 비빈들이 있었지만 자식이 단 한 명도 없어 만년의 삶을 더욱 힘들게 했다. 뜨득은 늘 자신의 삶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며 미래에 본인이 묻히게 될 황릉을 찾아 허송 세월만 보냈던 것이다.

 
 
▲ 황제의 능침을 지키고 서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

#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뜨득황릉

뜨득황릉은 응유옌 황제들의 7개 황릉중 가장 완성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능은 중국 청나라 시대의 능제를 많이 참고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건물의 명칭이나 그 기능이 청대의 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 능원 전체는 황제 사후의 궁전을 대비해 큰 규모로 지어졌으며, 풍수지리를 철저히 고려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장소를 택해 건설됐다.

능은 크게 중심 구역과 주변 구역으로 나뉘는데, 뜨득 황제가 휴양을 위해서 사용했던 중심 구역은 주거공간과 연회장, 연못, 차마시는 곳 등으로 비교적 산밑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능침과 비정이 위치한 주변 구역은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능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연꽃이 가득한 루키엠(Luu Khiem)이라는 연못이 나타나고 연못 한 쪽에는 쑹키엠(Xung Khiem)이라 불리는 정자가 그림같은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맞는다. 바로 이 연못과 정자에서 뜨득황제가 시를 읊곤 했던 것이다. 연못을 지나 좀 걷다보면 궁전인 키엠쿵(Khiem cung·謙宮)이 나오는데 궁안에는 황제의 집무실로 쓰였던 호아 키엠 디엔(Hoa Khiem dien·和謙殿)이 나타나고, 현재는 이곳에 황제와 황후의 위패를 모셔놨다. 키엠쿵 뒤편에 있는 민 키엠 드엉(Minh Khiem Doung·鳴謙堂)은 일종의 극장인데 이곳에서 황제는 베트남 전통 가극을 관람하곤 했다.

▲ 황제 전용 극장인 민 키엠 드엉(Minh Khiem Doung·鳴謙堂).

중심 구역을 벗어나 산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명·청황릉이나 우리의 조선왕릉처럼 석물(石物)들이 등장하고 드디어 황릉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현지 베트남 사람보다 훨씬 아담한 문·무인석 4쌍과 코끼리와 말 한쌍씩 조각해 놓은 석상들은 중국과 조선의 석물들과 비교해 보면 귀엽다는 느낌까지 든다. 석물을 지나 좀더 걸으면 나비아(Nha bia)라고 하는 비각이 나오고 비각을 지나 한참 더 올라가면 드디어 황제가 묻힌 무덤을 만날 수 있다. 뜨득황제의 무덤은 우리나라처럼 봉분을 쓴 것이 아니라 석조 양식으로 꾸며놓았다. 그러나 뜨득의 시신이 이 석관 밑에 실제로 묻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황제 사후 도굴을 막기 위해 황릉 조성에 참여했던 인부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실제 관은 다른 곳에 매장됐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발굴만 한다면 이런 루머는 쉽게 확인될 일인데, 이곳은 단 한차례도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것은 베트남 사람들이 영혼의 세계를 존중하는 관습이 뿌리 깊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아쉽긴 하지만 나름대로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베트남 사람들의 지혜에 박수를 보낸다. 오늘날 이곳 사람들은 이 사후 궁전을 이렇게 묘사한다. '슬픔이 웃고, 기쁨이 눈물을 흘리는 곳'. 희비가 엇갈리는 삶을 살았던 뜨득의 모습을 더 없이 잘 묘사한 것 같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