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응우옌(Nguyen) 왕조의 제 12대 카이딘 황제의 능은 베트남의 그 어떤 황제의 능보다도 화려하게 조성돼 있다. 카이딘 황릉의 중심 건물인 계성전(啓聖殿)에는 청동에다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등신상(等身象)이 안치돼 있고, 이 곳의 벽과 천장은 금색 자기와 유리 모자이크로 더없이 화려하고 현란하게 꾸며져 있다.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 140여년간 베트남 응우옌(Nguyen)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Hue)'는 1883년 프랑스에 점령됐고 1940∼1945년 사이에는 일본 점령하에 있었으며 1947년 4월에는 비공산계의 베트남 임시 행정위원회가 조직되기도 하는 등 근·현대사의 변화를 크게 겪은 곳이다.

   그리고 1949년 7월 1일 새로 수립된 베트남공화국이 수도를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으로 정하면서 예로부터 중심지 역할을 하던 이곳은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역사적 기념물과 건축물들을 보유했던 도시였지만, 1946∼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초기에 유적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베트남전쟁 때인 1968년에는 베트공의 공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이때 많은 왕족들의 건물과 박물관·도서관·불교사원 등이 파괴됐으며,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재건사업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릉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딘 황릉'은 그런 후에의 역사를 돌아볼 때 상당히 보존이 잘 된 편이다.

   중국의 명·청 황릉 중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것이 서태후(西太后)의 자희릉(慈禧陵)이라면 베트남에서 최고로 화려한 능을 꼽으라면 단연 카이딘 황릉이라고 할 수 있다.

 
 
▲ 카이딘 황제(Khai Dinh·啓定帝 1885~1925).

   # 프랑스의 꼭두각시 카이딘 황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12대 카이딘(Khai Dinh·啓定帝) 황제는 동 까잉 (Dong Khanh·景宗) 황제의 아들로 1885년 10월 8일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푹 부 다오(Phuc Buu Dao)였다.

   사실 동 까잉 황제 이후에는 타잉 타이(Thanh Thai) 황제와 쥐 떤(Duy Tan) 황제가 뒤를 이었는데, 이 두 사람은 프랑스로부터 식민통치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추방당하고 만다. 이 일이 있은 후 프랑스는 1916년 5월 18일 식민통치에 협조적이었던 부 다오를 황제에 앉히게 되고 그가 바로 카이딘 황제가 된 것이다.

   카이딘 황제는 1907년 첫번째 부인인 호앙 티 꾹(Hoang Thi Cuc)과 결혼했다. 이후 국무총리였던 호 닥 쭝(Ho Dac Trung)의 딸과 1913년 두번째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서 자식이 없었고, 나중에서야 뜨 꿍( Tu cung)이라는 첩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는다. 그녀는 이 아들(푸억 티엔·Phuoc Thien) 덕분에 황후의 자리에 앉게 되고, 아들은 카이딘의 뒤를 이어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Bao Dai) 황제가 됐다. 

   카이딘은 그의 아버지 동 까잉 황제와 마찬가지로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했고, 치료 목적으로 약을 많이 복용하다보니 약물 중독까지 됐다. 결국 그는 1925년 11월 6일 후에에 있는 황궁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통치기간은 1916년부터 1925년까지 9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첩중 하나였던 바삐(Ba Phi)의 증언에 따르면 카이딘은 잠자리에 관심이 없었으며, 육체적으로 매우 약했던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 프랑스 건축 양식을 본받아 설계된 카이딘 황릉은 입구에서부터 유럽의 고성(古城)이나 성당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카이딘이란 원래 '평화와 안정의 정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름뿐이었고, 그는 프랑스 통치자들에게 늘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 정통성을 주는 법안들을 제정하기 일쑤였다. 이런 점때문에 당시 베트남 사람들은 카이딘 황제를 매우 싫어했다.

   독립주의자들의 리더인 판  쩌우 트린( Phan Chau Trinh) 은 "조국을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민중들은 프랑스에 착취당하고 있는데, 궁전에서 화려한 생활만 하고 있다"며 카이딘 황제를 매우 비난했다. 또 응우옌 아이 꿕 (Nguyen Ai Quoc·호찌민)은 'The bamboo Dragon(竹龍)'이라 불리는 희곡을 써서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던 카이딘을 조롱했다.

   카이딘 황제의 지지율 폭락은 1923년 프랑스인들이 베트남 농부에 대한 세금을 올리자 절정에 달했다. 그것은 바로 카이딘 황제가 국민들의 세금으로 자신의 능을 웅장하게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베트남은 대공황을 겪었다.

   그러자 카이딘 황제는 판보이 쩌우(Phan boi chau)같은 민족주의자 리더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으며, 체포한 이들을 자국에서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통치 방법은 정치적 악수(惡手)에 불과했다.

   결국 성난 민중들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수많은 운동가들에 의해 응우옌 왕조는 스러지고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 황릉을 지키고 있는 호위무사와 말, 코끼리 석상.

   # 동서양의 건축 기술이 결합한 카이딘 황릉

   카이딘 황제는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고통만 안겨주고 세상을 떠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능은 더없이 웅장하고 화려하기만 하다. 후에 교외에 위치한 카이딘 황릉은 1920년에 건설이 시작돼 11년만인 1931년에 완성됐다.

   식민시절답게 전체적인 건축 틀은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카이딘 황제는 자신의 능 건설을 위해 1922년 직접 프랑스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그곳의 건축물들을 많이 참고해 황릉 건설에 반영했다.

   사실 카이딘 황릉은 서양 건축기술이 중심이고 동양적 건축문화가 최소한으로 결합했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느껴질 정도다. 무덤은 전체적으로 검은색과 회색의 콘크리트가 사용돼 무게감을 주며, 지붕에는 슬레이트와 연철(鍊鐵)이 사용됐다.

   능 안에 있는 궁전에는 서양식 피뢰침과 전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무덤은 콘크리트와 함께 곳곳에 색조유리와 자기들로 덮여 있다. 궁전 천장은 동양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용과 구름이 디자인돼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카이딘 황릉을 놓고, 건축학적으로 베트남의 '신고전주의(neo classicism)'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 황릉 안 건물에는 카이딘 황제의 초상과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식기와 자기들이 전시돼 있다.

   카이딘 황릉 입구를 들어서면 정문에서부터 중세 유럽의 고성(古城)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중국식을 본뜬 여타 황제릉과는 확연히 대비되는데 석조와 콘크리트로 된 고딕 양식의 건물과 첨탑들은 마치 유럽의 성당과도 흡사해 여기가 동양인지 서양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경사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각각 두 쌍씩의 문·무인석을 만나게 되고 문·무인석 뒤에는 6기의 호위무사상이 별도로 배치돼 있다. 황제를 호위하는 석상의 얼굴들 중에는 서구적인 얼굴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말과 코끼리 석상이 든든하게 그들 옆을 지키고 있다.

   카이딘 황릉의 중심 건물은 계성전(啓聖殿)이다. 황제의 무덤이 위치한 이곳에는 청동에다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등신상(等身像)이 안치돼 있다. 이 등신상은 1920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인데, 실제 카이딘 황제의 크기와 똑같이 만들어졌다.

   황제의 유골은 바로 이 동상 아래 지하 18m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계성전의 벽과 천장은 서양식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금색 자기와 유리 모자이크로 화려하고 현란하게 꾸며져 있어 제대로 눈을 뜨고 쳐다보기 힘들 정도다.

▲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용품을 태웠던 분백로(焚帛爐).

   계성전과 연결된 방에는 카이딘 황제의 사진, 입상(立像), 평소에 식사를 했던 디너테이블, 찻잔과 자기들, 생전에 그가 사용했던 유물들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그가 동양 전통의상이 아닌 서양식 황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라를 재건하고 싶었지만 제국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조선의 고종(高宗) 황제가 떠올랐다.

   나라는 비록 달랐지만 그들의 운명은 비슷했다. 그들이 황제의 권위를 국민들에게 보이기 위해 택할 수 있던 카드는 멋진 황릉 조성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