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전상천기자]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걸어서 횡단한 혜초가 머물렀던 쿠처. 중국 4대 고전명작인 '서유기'(西遊記)에 여인국으로 묘사되고 있는 쿠처는 서역과 중원문화, 신라와 고구려 등 한반도와 문명교류를 했던 '서부지역의 유흥의 도시', '노래와 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불교가 흥성한 오아시스 육로의 핵심 도시인 쿠처는 동아시아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경제·문화의 꽃을 피웠고, 군사적으로 외침에 대비해 서역도호부를 설치할 정도로 군사적 전략요충지다.
그러나 지금은 가스 등 지하자원을 활용해 경제발전을 시도하고 있는 작은 산업도시에 불과하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일찍이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의 기초는 문명이고, 문명 그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발생·성장·해체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 흥망성쇠를 거친다고 구명한 바 있다. 문명발전의 추진력이 고·저차 문명간 '도전'과 '대응'의 상호작용인 만큼 옛 문명의 꽃을 다시 피울 수 있을 지 주목된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의 유물 등 문명의 공통점을 쿠처가 공유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중국 전역을 관통하는 실크로드를 타고 소위 '한류'가 다시 화려하게 만개할 날을 고대해 본다.
▲'문명 약탈자의 흔적, 커즈얼 천불동'=쿠처 시내를 둘러본 경인일보 취재진은 쿠처서 투루판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한 뒤 커즈얼 천불동을 찾아 나섰다. 커즈얼 천불동은 웨이우얼어로 키질 천불동이라고도 한다.
커즈얼 천불동은 중국 산시 타이위안의 운강과 하난 뤄양의 용문, 신장 둔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중 하나로, 가장 건설 연대가 이른 곳이다.
천불동으로 향하는 여정은 새로운 길이 곳곳에서 개설되고 있어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러나 커즈얼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깎아지른듯한 산들로 구성된 장관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세찬 바람이 불면서 커즈얼 계곡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두리번 거리기도 했다. 이곳의 야단지형은 바람이 불면 귀곡성이 들려 마귀성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해저융기가 일어난 독특한 이 지형은 예전에는 바다였고, 한복판을 흐르는 수량적은 강들이 눈에 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커즈얼 지역을 2시간 이상 달려가 도착한 천불동은 강을 끼고 앉아 울창한 작은 녹색도시로 꾸며져 있었다.
급한 마음에 내달려간 230여개의 동굴로 된 천불동은 중국 최초의 석굴사원으로 인도 승려 구마라습이 한어로 불경을 번역한 곳이기도 하다. 승려 구마라습이 앉아 있는 모습 너머로 보인 석굴사원은 생각보다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석굴사원 양식은 바미얀석굴에서 비롯, 불교문화 동점의 일환으로 쿠처에 파급된 뒤 서역북도를 거쳐 중국의 둔황석굴의 모태를 이뤘으며, 신라 석굴암 등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특히 쿠처의 커즈얼석굴사원 내부에 장식되어 있는 벽화에는 서방적 ·인도적인 요소가 잘 나타나 있어, 미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문화재의 약탈과 잘못된 보존으로 석굴벽화는 제대로 보존돼 있지 못하다. 석굴 곳곳이 무너지거나 훼손돼 아쉬움을 더했다. 석굴을 만들어 내세의 복을 기원하던 옛사람들의 뜻은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10호 굴에 지난 1940년대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한 조선족 화가 겸 고고학자 한낙연의 글과 사진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 석굴연구로 큰 업적을 남겼는데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라 그런지 보존상태는 볼품이 없었다.
쿠처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수바스고성을 들렀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돌아올 때 2개월간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위진시의 불교유적인데, 아쉽게도 지금은 절터와 무너진 벽 등만이 남아 '황량함' 그 자체였다.
당나라의 안서도호부 유적으로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4천600m의 탄구령을 넘어 토번과 사라센을 정벌하고 750년께 부도호(副都護)로 재직했던 곳이기도 하다. '파미르의 주인'으로 평가받는 고선지는 당의 무장이기에 앞서 고구려 땅에 태를 묻은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위대한 민족의 얼과 슬기를 세계에 드높였다.
▲'활력 넘치는 쿠처 구시가지'=쿠처로 되돌아온 취재진은 오후 3시께 인민광장과 산업공단, 비행장이 있는 신시가지를 벗어나 바자르가 항시적으로 열리는 구시가지로 갔다. 쿠처는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 옛마을과 새롭게 조성된 신시가지간의 삶의 격차는 크기만 했다. 우선 구시가지에 있는 쿠처사원을 찾아갔다. 마을 한복판에 있어 눈에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사원의 위용은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사원 내부의 모습은 여느 작은 사원과 다름 없었지만 관광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쿠처 구시가지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강 다리에 맞닿아 있는 바자르는 초라하기 그지 없지만 옛장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이기도 한 시장에선 양고기와 닭, '낭', 과일 등을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숍에서 팔고 있었다.
꿀 등 전통음식 재료를 팔고 있는 가게에 엔진을 단 휠체어를 탄 노인이 병을 모아 가져다 준 뒤 돈 10원을 받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길거리에 펼쳐놓은 물건을 흥정하거나 길 한편에서 머리를 깎고 면도를 하는 자연스러운 모습 등이 도시의 역동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삶의 활기가 가득 차보였다. 우연히 이 도시의 옛스러운 모습을 담고자 나선 사진여행단과 조우하기도 했다.
어느덧 시장 저편엔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취재진은 저녁을 한 뒤 3일간 카스서 호티엔,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쿠처까지의 여정을 책임져준 웨이우얼 운전사와 아쉬운 포옹을 한 뒤 쿠처역에서 투루판행 기차에 올랐다.
※ 혜초가 남긴 씨앗 '한류'… 서역악기 '악무' 고구려·신라 전파 '끈끈한 인연'
'혜초가 남긴 씨앗, 한류'.
쿠처의 역사화 문화는 한반도에서 꽃을 피웠다. 혜초와 고선지를 비롯, 선현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데다 쿠처의 악무가 동방으로 전해졌으니 우리네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도시다.
실크로드학의 대가인 정수일 문명사연구사는 혜초와 고선지장군 그리고 악무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을 근거로 쿠처를 우리나라 겨레사의 일부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유물 중에서 쿠처와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문명 요소들을 손꼽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악무다. 중국 수나라때의 구부기(九部伎)나 당나라때의 십부기에 사용되는 악기들 중에는 서역 악기에 속하는 5현이나 요고, 동발, 공후, 피리, 저, 소 등의 악기가 고구려기와 구자(쿠처)기에 공통으로 등장한다.
또 고구려의 장천1호분 벽화에는 오현이, 고구려의 집안4호분 벽화와 신라의 비암사 아미타불삼존석상에는 요고가, 신라의 상원사 범종 종신에는 공후가, 고구려의 장천1호분 벽화에는 피리가 그려져 있어 두 지역간의 활발한 악무 교류가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특히 9세기 대문호 최치원이 저술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는 신라때 유행한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 등 다섯 가지 놀이를 소개하고 있는데, 모두가 서역 계통의 것이다. 이중 사자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무형문화유산인 '북청사자놀음' '봉산탈춤', '통영오광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소개한다.
사진┃조형기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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