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오키나와현(沖繩懸)은 40여개의 유인도와 수많은 무인도로 이뤄져 있다. 이들 섬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오키나와 본도(本島)이며, 그 안에는 현청 소재지인 나하(那覇)시가 자리잡고 있다. 나하시의 반경 1천500㎞내에 오사카, 서울, 마닐라, 홍콩 등이 위치해 있어 오키나와는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동남아시아·일본과의 중간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은 에메랄드 빛 바다와 기암절벽이 만드는 수려한 경관과 함께 연평균 기온이 약 22℃로 늘 따뜻해서 우리나라 프로야구팀들이 겨울철 전지훈련을 하러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섬 남부에는 고대 류큐(琉球) 왕국의 사적지가 있는데 이중 주목할 만한 것은 '슈리성터(首里城跡)'와 '다마우돈(玉陵)'이다. 이들은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 본토에 편입돼버린 류큐(琉球) 왕국
오키나와는 원래 17세기까지 '류큐'라는 이름의 독자적인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의 전통 문화를 살펴보면 언어, 풍속, 습관, 신앙 그밖의 모든 점이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일본보다는 중국 남방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류큐라는 글자는 명실록(明實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1368년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해 왔던 몽골인의 국가 원(元)이 멸망하고, 한족의 국가인 명(明)이 건국되면서 그 여파가 류큐에도 밀려왔다. 명 태조 홍무제(주원장)는 건국 후 여러 나라에 사자를 보내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리고 그들에게 복속을 촉구했다. 류큐 왕국도 당시 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명나라에 순순히 조공을 바치며 청대(淸代) 말까지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갔고, 조선과 일본 본토, 동남아시아간의 무역 중계지로서 번영을 누리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그러나 독립국가로서 나름대로 명맥을 이어왔던 류큐왕국은 1609년 사쓰마번(薩摩藩·현재의 가고시마)의 시마즈(島津) 가문이 보낸 군대 3천명의 침략을 받고 그들에게 완전히 정복당하고 만다. 이후 1879년 메이지(明治)정부는 류큐 사람들의 반발을 누르고 '오키나와(沖繩)'라는 이름으로 섬 전체를 일본에 편입시켜 버렸다. 류큐라는 이름이 사라져 버리게 된후 오키나와에서는 제2차세계대전때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일본군과 미군이 벌인 '오키나와 전투'로 민간인들까지 포함해 20여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중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 전사자도 1만5천~2만명이나 된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오키나와의 권리를 미국에게 내주고, 이후 섬은 27년간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러다 1971년 6월 17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오키나와 반환 협정이 조인되고, 1972년 5월 15일에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 영토로 편입된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아시아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미군 기지는 계속 남아 있으며, 일본내 미군기지의 74.8%가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 이 섬에 집중돼 있다.

# 류큐왕국의 상징 슈리성(首里城)
슈리(首里·현재 나하시 동부)는 450년간 독립 왕국을 이뤘던 류큐 왕국의 수도이다. 13~14세기에 류큐에는 수많은 호족들이 난립하면서 구스쿠(구릉 위에 있는 성과 요새)를 쌓고 항쟁했다. 그러던 중 1429년 '쇼하시(尙巴志·1372~1439)'라는 영걸이 등장해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차지, 나머지 호족들을 제압하고 류큐 왕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제1쇼씨왕조'를 수립한다. 그는 왕으로 등극해 구스쿠들 중의 하나였던 슈리성(首里城)을 확장·정비해 왕성(王城)에 걸맞게 만들었으며, 정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꾸며 갔다.
나하시에서 가장 높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는 슈리성은 일본 본토에 있는 성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류큐 왕국이 독립국가로 유지되면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정전(正殿), 북전(北殿), 남전(南殿)이 주변을 감싸고 중앙에 광장을 설치한 형태의 공간 구성은 쯔진청(紫禁城)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궁전 양식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왕이 거주했던 정전(正殿·세이덴)은 류큐 왕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로 붉은색 외관과 군데군데 금박을 입힌 장식, 중앙의 당파풍(唐破風·차양을 목적으로 한 반 곡선형태) 장식이 있어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전 곳곳에서는 용(龍) 문양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국왕의 상징으로 총 33마리가 그려져 있다.

사서 기록에 의하면, 슈리성은 몇번이나 소실돼 그 때마다 재건돼 왔다. 그리고 건물 일부가 일본 육군 6사단의 군영이나 학교로 이용되기도 한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는 정전을 비롯한 몇개의 건물이 국보였지만, 1945년 오키나와 전투와 전후 류큐대학의 건설로 성곽 전체가 거의 파괴돼, 얼마 안되는 성벽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 1980년대 말 류큐대학이 니시하라 정(西原町)으로 이전되면서 슈리성의 복원은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됐으며, 1992년에는 정전 등의 건축물과 성곽이 재건돼 슈리성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됐다. 정전 뒤편에 있는 성곽이나 일부 건축물들의 재건사업은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류큐의 왕릉 다마우돈(玉陵)
슈리성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슈레이문(守禮門)에서 500여m 아래로 내려오면 류큐 왕국의 독특한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다마우돈'을 만날 수 있다. 슈리성과 무척 가까운 편인데도 오키나와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슈리성만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이곳은 비교적 한산하고 조용한 편이다. 다마우돈은 류큐 왕국 '제2쇼씨왕조'의 역대 국왕들이 잠들어 있는 능으로 1501년 제3대 쇼신왕(尙真王)이 그의 아버지인 쇼엔왕(尙円王)의 유골을 이장하면서 건물을 짓기 시작한 뒤, 이후 후대 왕들의 유골이 계속 이곳으로 안치됐다.

총면적 2천442㎡로 오키나와 최대 규모에 검회색 돌들을 쌓아 만든 이 무덤은 집처럼 지붕이 달려있는 '파풍묘(破風墓)'의 형태로 구성돼 있다. 파풍묘로 만든 까닭은 류큐의 왕들이 중국의 황제처럼 그들 나름대로 사후의 궁전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규모로 능원을 만듦으로써 조상 숭배 신앙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국내 통치에 안정을 가하려는 의도도 들어있다.
왕릉은 크게 중실(中室), 동실(東室), 서실(西室)로 구분된다. 중실은 장례후 유해가 썩어 뼈만 남을 때까지 방치했다가 세골(洗骨·뼈를 골라내어 씻음)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방이고, 세골이 이뤄지면 왕과 왕비의 뼈는 수습해 동실에 두며, 왕과 왕비를 제외한 다른 왕족들의 유골은 서실에 보관했다.

이처럼 이곳에서는 화장(火葬)이나 매장(埋葬)이 아닌 류큐인들만의 독특한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다. 아쉽게도 일반에 공개가 되지 않는 이들 묘실 내부는 천연 암벽을 도려내 만들었으며,안에는 별도의 유골함이 들어있다고 한다. 이곳 역시 슈리성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74년부터 3년 남짓되는 기간동안 복구 공사가 진행돼 옛 모습을 되살려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중국 황릉처럼 화려하거나 많은 유물이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소박하면서도 위엄을 주는 다마우돈은 오키나와에 독립적인 왕국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알리는 명실상부한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다.
사진┃임열수기자 pplys@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