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조성면(문학평론가·인하대 강의교수)]철도는 근대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다. 철도야말로 근대문명의 표상이자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메시지나 정보를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일뿐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감각기관을 확장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술들을 가리킨다. 옷과 안경이 피부와 눈의 확장이라면, 철도와 책은 발과 사고의 확장이다.
미디어는 정보의 밀도와 참여도에 따라 쿨 미디어와 핫 미디어로 나뉘는데, 안경이 핫 미디어라면 선글라스는 쿨 미디어다. 예를 들어 안경 쓴 여성보다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남성의 시선을 더 끄는 이유는 주어지는 정보의 양이 적기 때문에 남성으로 하여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고 상상력을 통해서 상대의 외모와 전모를 파악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과 인식에 영향을 주면서 인간관계와 사회제도를 변모시키기도 한다. 요컨대 인쇄술의 등장이 근대인들의 시각적·논리적 사고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민족주의와 산업주의로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철도의 등장은 실로 어마어마한 미디어 혁명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단축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근대 도시 출현과 새로운 노동 형태 그리고 여가 생활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사람과 화물을 운반했으며 근대적인 삶과 정신과 정보와 문화를 세계 방방곡곡으로 실어 나르고 전파했다. 증기 엔진은 도입된 지 채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거대한 세계적 연결망과 교역의 네트워크를 구축해냈다. 세계의 축소, 거리의 소멸 그리고 근대의 완성이라는 위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한마디로 철도는 근대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의 견인차였다.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이 철도 부설권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며 철도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영등포(永登浦)는 이와 같은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한국근현대사의 디스플레이어이다.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영등포는 한강과 안양천 그리고 도림천과 대방천이 교차하고 합류하는 낮은 지역으로 홍수가 잦던 한촌(閑村)이었다. 젊은 날 신촌과 이 일대를 오가며 대학생활을 했던 자영업자 유재일(62학번)씨는 철도가 들어선 이후에도 영등포는 1919년 인촌 김성수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장으로 '태극성'이란 광목을 생산했던 경성방직과 기관차 공작창 일대를 제외하고는 비만 오면 매번 물난리를 겪던 교외지역이었다고 술회한다.
철도의 등장이 도시 발전과 성장의 만능 요술방망이는 아니었다. 철도의 등장으로 인해 변화가 급격히 진행된 곳도 있었고, 완만하게 변화하던 곳도 있었으며, 변화가 점진적이어서 별로 크지 않다가 별안간에 발전한 곳이 있었다. 영등포역과 그 일대는 가장 후자 쪽으로 완만한 변화와 비약적 발전을 동시에 경험한 수도권 서남부의 최대 거점도시이다. 특히 이곳 영등포는 경인선과 경수선 등을 포함한 전철 1호선을 비롯하여 경부선·호남선 ·전라선·장항선·KTX 등 거의 모든 노선이 거쳐 가거나 정차하는 철도교통의 중핵이다.
서울역·용산역 등과 함께 철도 교통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 영등포역은 1899년 역사가 들어선 이래 1965년에 개축되었고 지난 1995년에는 국내 최초로 민자역사 시대를 열었다. 기실 영등포는 1901년 8월 20일 경부선 북부 구간 기공식이 열린 철도의 도시였다. 이 같은 변화를 거치면서 영등포역 주변은 롯데·신세계·타임 스퀘어(구 경방필) 등 쇼핑 타운으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비자본주의의 만화경 같은 아케이드 스트리트로―즉 상품의 미학을 구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철도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현대적 건축물들로 가득한, 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이 메트로 스테이션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시와 시인이 있다. 바로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와 그의 절창 '지하철역에서(In a Station of The Metro)'.
군중들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얼굴들
검은 가지 위의 젖은 꽃잎들.
The apparitions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일본의 하이쿠(俳句) 영향의 흔적이 분명한 이 짧은 두 줄짜리만큼 강렬한 철도문학―지하철시는 없다. '지하철역에서'는 전동차의 도착과 출발 사이에 벌어진 사태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를 우리의 통상적 경험으로 바꿔 풀어보기로 하자.
우선 첫 행은 전동차의 도착과 함께 차창 안의 승객들이 액자 속의 인물사진처럼 갑자기 나타난 느닷없음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전동차가 출발하는 순간 승객들의 얼굴들은 서서히 흐릿해지다가 이지러지면서 형형색색의 선으로 획하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마치 유령처럼, 꿈결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격무에 시달렸을 얼굴이 희멀건, 피로에 지친 아 우리 시대의 꽃잎들. 이런 관점에서 두 번째 행의 '검은 가지'는 필시 전동차일 것이고, 꽃잎이 젖어 있다는 표현은 이와 같은 현대인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이 시는 출퇴근길에 또는 일상생활 속에서 목격되는 현대인들의 산문적 삶을 지하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포착, 이미지화한 애상적인 작품이다.
이 절창을 남긴 파운드는 풍운아였으며, 기백이 넘치는 시인이자 비평가였다. 이백(李白, 701~762) 등 당시(唐詩)를 번역, 소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반미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연금되기도 하였다. 전 세계 문인들의 탄원과 구명운동으로 1958년 석방되자 곧바로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첨단 민자역사도 좋고, 쇼핑타운도 좋지만 무엇보다 우리 지하철역과 철도에도 멋진 역사와 문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운드의 '지하철역에서'를 떠올리며 갑자기 세계시장에 내놓을만한 이런 시인과 시와 문화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들었다. 바람 부는 겨울의 초입 영등포에서.
※ 사진┃김범준기자 bj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