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량진과 용산 사이를 가로 지르는 한강 철교.

[경인일보=글┃조성면(문학평론가·인하대 강의교수)]길의 본령은 소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도시와 도시 사이를 매개하고 이어주는 것은 길의 사명이며, 존재이유일 것이다. 강물은 흘러야하는 것처럼 길은 늘 열려있어야 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렇게 흐르고 소통하면서 우리는 삶을 이어왔고, 문명을 만들어냈다.

모든 문명은 강에서 태어났다. 소통하고 흐르는 강에서.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지역과 지역을 잇는 길을 통해서. 그러고보니 뉴욕의 허드슨, 런던의 템스, 파리의 센, 도쿄의 아라카와, 카이로의 나일, 그리고 서울의 한강 등 세계적인 대도시들은 모두 흐르는 강을 끼고 있는 강변 도시들이거나 길과 강이 어우러진 도진취락(渡津聚落)이었다.

도진취락은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여 강변 양안에 사람들과 물산이 모여들고 소통하면서 형성된 자연취락으로 대개가 교통의 요지요, 물류의 중심지들이었다.

천년의 영광을 누린 신라의 경주, 일본 고대 문명의 젖줄이었던 백제의 웅진과 부여, 그리고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평양 역시 형산강과 금강과 대동강을 끼고 있던 강변 도시들이었다.

여기, 흐르고 소통하는 강과 길의 도시가 있다. 경인선이 시작된 곳.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개통식이 열리고 한국 철도의 새 역사를 연 곳. 바로 노량진.

▲ 노량진역사.

노량진은 수양버들이 군집을 이루고 백로가 날아들던 노들나루, 곧 전통적인 도진취락이었다. 도진취락이 철도로 인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을 보면, 확실히 철도는 야누스적이며 마키아벨리적이다. 한편에서 전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적정선에서 전통과 기민하게 타협하며 이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나루터 노량진이 철도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도진취락이었기 때문이다. 물동량과 유동인구가 많아 언제나 안정적으로 승객이 확보될 수 있는 황금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지명에서 도(渡)·진(津)·제(濟)가 붙은 도시 혹은 마을들은 수상교통의 요지인 나루터 곧 진도처(津渡處)의 표식이며, 우리나라 철도역 상당수는 도·진·제같은 전통적인 도진취락에 다리를 놓고 정거장을 세워 교통의 거점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 서울을 감아도는 한강에는 도미진·광나무·삼전나루·중량포·서빙고나루·흑석진·동재기나루(동작동)·한강나루·노들나루(노량진)·두모포(동빙고동)·용산강·삼개(마포)·서강·율도·양화도·공총진 등 모두 열여섯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2008년 현재 팔당댐에서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세워진 교량은 철도교를 제외하고 모두 35개가 있으며, 한강에 세워진 교량들의 대부분은 거의 모두 나루터 자리요 길목에 들어서 있다는 점이다.

▲ 노량진역사내 진입하는 열차.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서울로 통하는 아홉 개의 도로망이 있었다. 이른바 '사방최긴지구대로(四方最緊之九大路)'. 말이 대로지 실제로는 수레 한 대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길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이 도로들이 서울과 전국 각 지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소통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서울~부산은 제4로로 3천720리요, 서울~인천은 제9로로서 강화까지는 240리였다. 서울~부산은 한강 ·판교·용인·장호원·충주·문경·안동·대구·밀양 등의 도시를 연결하는 몇 갈래의 길들이 있었고, 서울~인천은 양화도·김포·갑곶진·강화 또는 서울·양화도·오류·부평·관교동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옛날 인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은 지금 같은 노량진과 용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선이 아니라 밤섬 서쪽에 위치한 양화대교 방면이었던 것이다.

철도가 부설되기 이전, 육로는 다섯 개 유형으로 범주화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 한 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은 첩(捷)이요, 소나 말이 다닐 수 있는 길은 경(徑)이다. 수레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길은 도(途)요, 두 대가 다닐 수 있으면 도(道)이고, 세 대가 동시에 다닐 수 있는 가장 큰 길을 로(路)라 했던 것이다.

▲ 을축년(1925년) 대홍수로 인해 한강철교가 유실됐다. 당시의 홍수를 기념하는 '을축년대홍수기념비'.

서울(한양)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우리의 길은 첩과 경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산악 국가였기 때문에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대로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풍수와 같은 물활론적 사고에 위배되는 일이었으며 또한 침탈이 잦았던 우리 입장에서 큰 길을 내는 것은 외적에게 목을 내주는 격이니 최고의 금기였던 것이다.

이같은 전통적 도로망과 소통의 방식을 송두리째 뒤바꾼 터닝포인트가 바로 경인선이었다. 경인선이 개통되었을 당시 인천(제물포)·축현·우각·부평·소사·오류·영등포·노량진 등 정차역이 모두 여덟 개였다. 그러다가 1900년 7월 5일 최대의 난공사였던 한강 철교가 완공된 이후, 같은 해 11월 12일 서대문역에서 전통식을 갖고 용산·남대문·서대문역으로 노선을 연장하면서 경인선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남대문역은 지금의 서울역(경성역)이고, 이화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서대문역은 한동안 경인선과 경부선 등 한국 철도의 종착역으로서의 역할을 하다가 1919년 3월 31일에 폐지된다.

경인선의 랜드마크요 화룡점정은 단연 노량진과 용산 사이를 가로 지르는 한강 철교일 것이다.

▲ 노량진역사내 철도.

경인선의 특징은 전 구간 모두가 대체로 지세가 평탄하여 터널이 없었다는 점인데, 유일한 난공사는 한강에 교량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한강철교 교각은 모두 9개였으며, 수면에서 교각까지의 높이는 11.2m였다. 교량 건설에 사용된 자재로는 철강 1천200t에 벽돌 120만장 그리고 시멘트와 석재가 각각 5천통과 5만개가 투입되었다. 현재 한강철교는 상류에서 하류로 A-B-C-D 등 4개선이 있는데, A선이 가장 먼저 건설된 다리이다. 한강의 수심을 재고 장마철의 최대 수심까지 고려하여 교량을 만들었지만, 한강철교는 곧 큰 고비를 맞게 된다. 1925년 7월 18일 중부와 강원지역을 덮친 미증유 폭우,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 철교가 유실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 한강이 범람하면서 서울역 부근까지 물이 올라왔으며, 송파 나루터 일대가 몽땅 떠내려가는 대참사를 입었다고 한다. 송파구 송파1동파출소 근린공원 주차장에는 당시의 대홍수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이를 기념하는 '을축대홍수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경인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지난날의 삶과 역사를 만나게 되니, 경인선은 그 자체가 이미 거대한 기억의 창고이자 역사의 랜드마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