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여선과 수인선의 회차용으로 만들어 둔 것이 세류삼각선인데 이 일대는 현재 세류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보도 블록이 철길 모양으로 만들어진 게 인상적이다.

[경인일보=글·사진┃조성면(문학평론가·인하대 강의교수)]낡은 사진, 녹슨 철길, 건널목 표지판…. 옛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소품들이다. 여기에 민폐가 되지 않을 착한 눈이라도 내려준다면 친구들과 함께 이런 얘기를 안주 삼아 따끈한 어묵 한 사발과 소주를 나누는 게 제격일 것이다.

추억은 늙지도 않는가. 어스름 저녁 기적 소리 울리며 세류 삼각선을 돌아 수원역으로 되돌아가던 까만 기관차와 기차 바퀴에 납작하게 눌려 만들던 대못칼 그리고 뒤뚱대며 느릿느릿 인천으로 향하던 두 량짜리 동차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참, 레일 위의 대못이 기차바퀴에 튕겨나가지 않도록 입안에 침을 가득 모았다가 뱉어 두는 건 수인선(水仁線)과 함께 잔뼈가 굵은 우리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노하우였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때 그 시절 인천과 수원을 오가며 군자 염전의 소금과 소래포구의 참게를 쉼 없이 실어 나르던 바지런한 꼬마열차. 황혼녘 드넓은 야목의 들판과 소래철교를 지나 햇빛이 노루꼬리만큼 남았을 때 수원역 혹은 송도역에 도착하여 통학생들과 좌판 아주머니들을 부려놓던 서민열차. 바람과 갯벌과 사연들이 모여 시(詩)가 되어버린 추억열차, 수인선!

▲ 철도박물관에 전시된 수인선 열차.

수인선은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미지의 열차라 할 수 있다. 낭만열차의 상징이요 문학작품의 단골 소재로, 노장들 사이에의 이야깃거리로 호명되기는 하지만, 이렇다 할 대표작이 나오지 않은 것이 그 증거다. 그 점에서 수인선은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아랫면처럼 또 세상의 모든 사물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볼 수 없는 눈처럼 보되 보지 못하며, 알되 잘 알지 못하는 한국철도사의 블라인드 스팟 이른바 마리오트의 맹점(Mariotte's spot)일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에게나 과거는 언제나 돌아가고픈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고단한 현실과 돌이킬 수 없는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과거라고 어찌 모두 아름다울 것이며 절실하게 돌아가고픈 유토피아이겠는가. 특유의 친근함과 정취에 매료돼서 그렇지 수인선의 탄생 배경과 기원만큼은 그다지 반갑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보아 근사하고 멋진 것들 일수록 그 기원이 추악하고 우스꽝스러운 경우도 적지 않다. 비근한 예로 일본학 입문서로서 정전(正典)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루스 베네딕트(R. F. Benedict, 1887~1948)의 '국화와 칼'이 미 국무부의 지원에 힘입어 단 한 번도 일본에 가보지 못한 어용(?) 인류학자의 작품이며, 마드모아젤들의 애용품인 하이힐이 화장실 문화가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것이 그러하다. 특히 궁궐에 화장실이 갖춰져 있지 않아 귀족들은 파티 도중 용변을 건물 밖의 뜰에서 대충 해결해야 했고, 그 때문에 다른 이용객들이 지뢰(?)를 밟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곤 했다고 한다. 궁즉통이라고 궁리 끝에 구두 굽을 높여 불의의 사고로부터 옷을 보호하고 엉덩이의 고도를 높여줌으로써 곤경을 면했다는 하이힐 탄생의 기원 비화는 저명한 예다.

▲ 수인선 급수탑.

협궤열차의 대명사 수인선은 서민열차와는 거리가 먼 경동철도주식회사(京東鐵道株式會社) 소유의 사설철도이며, 쌀과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수탈의 노선이었다. 강원 내륙의 목재와 여주 및 이천의 쌀을 수송하기 위해 만든 수여선(水驪線)과 인천항을 연결하기 위해서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인스턴트 철도였던 것이다. 수인선은 1926년부터 인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논의는 무성했지만, 경제성과 실효성에 대한 논란으로 자꾸 미뤄지다가 1936년 5월 16일 인천 화정(花町) 매립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6월 1일부터 공사에 돌입하여 1년 2개월만인 1937년 8월 6일에 개통을 보게 되었다.

수인선은 총연장 52㎞에 궤간 762㎜의 단선 협궤열차로 개통 당시 수원·고색·오목·어천·야목·빈정·일리·성두·원곡·신길·군자·소래·논현·남동·문학·송도·인천항 등 열일곱 개의 역을 한 시간 사십분에 주파하였다. 수인선의 전성기는 1942년까지로 이 기간 동안 준수한 영업 실적을 올리자 일각에서 레일 광궤화같은 노선개량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인선은 1943년 총독부의 정책 기조의 변화로 조선철도주식회사로 흡수되었고, 일제의 패망, 해방공간기의 혼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점차 쇠퇴하여 여객노선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 수원역 전경.

경제성도 없고 시설도 낙후됐지만 수인선에 온기를 불어넣은 것은 이 땅의 주인인 서민들이었다. 찻삯을 아끼려 치마 속에 곡식자루를 숨겨 타는 뻔한 수법으로 검표하는 차장을 난감하게 만들던 우리 어머니들과 열차시각에 맞춰 출발하는 기차를 불호령을 내리며 멈춰 세우고는 느긋한 양반걸음으로 걸어와 기차에 오르던 할아버지, 또 예의와 염치가 지나쳐 신발을 철길에 벗어두고 버선발로 기차를 타고 내릴 때 신발 찾아 달라며 기관사에게 통사정하던 할머니야말로 수인선 신화의 주인공들이다. 비록 경인선이나 경부선처럼 한국 근대사를 뒤흔들만한 큰 드라마는 없었지만, 수인선은 신산한 삶에 한줄기 웃음을 안겨주던 에피소드로 가득한 휴먼 트레인이었다. 그러므로 수인선 승객들에게는 윤후명의 장편 로맨스 '협궤열차'보다는 정동수의 중편소설 '눈깔사탕'과 '몽당연필' 그리고 이상락의 단편소설 '천천히 가끔은 넘어져 가면서'에 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폭설주의보가 발령된 주초 오랜만에 친구들과 번개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문득 눈 속에 파묻혀 끝내 찾지 못했던 대못칼이 생각났다. 출세와 재물과는 인연이 없으니 그저 마음관리, 건강관리 잘 하며 애들 뒷바라지에나 충실하자던 소시민의 드높은 기개는 오간데 없고 친구가 출세했다는 소식에 아내와 소풍을 나갔다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의 착잡 초연한 작품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는 이 밤 자꾸 수인선과 그 옛날을 생각하는 것은 질투심과 자괴감을 떨쳐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필시 끝내 찾지 못했던 유년시절의 잃어버린 대못칼들이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어 자꾸 마음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