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옛날 성서 속의 이야기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매번 거짓말 같은 기적을 목격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 인천시 동구 화수동 266의 1 '민들레 국수집'이 바로 그곳.
이 식당은 만우절에 생겨난 식당답게 밥값 대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만 하면 된다. 인사마저도 불편하면 안 해도 그만. 어느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는다. 정말 거짓말 같은 식당이다.
이 기적 같은 국수집의 주인장은 한때 가톨릭 수사였던 서영남(57)씨. 그가 이곳을 꾸려온 지 어느덧 8년 가까이 지났다.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밥을 나눌 목적으로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은 그가 당시 가진 전 재산 300만원을 들여 6인용 식탁 하나를 놓고 시작했다. 국수 6상자, 쌀 한 포대, 국그릇 10개, 국수그릇과 반찬그릇 20개 단출한 살림으로 시작했다.

그랬던 국수집이 지금은 20명도 여유 있게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형편이 좋아졌다. 또 변한 게 하나 있다. 식당 이름은 '민들레 국수집'이지만 더 이상 국수를 나눠주지 않는다는 것. 서씨는 "밥은 배불리 먹어 지겨우니 국수 좀 달라"고 말할 때까지 밥을 고집할 생각이다.
그가 인천 동구의 노숙자들을 거두기로 한 계기는 이렇다. 그가 수도원 생활을 청산하고 출소자 몇 사람과 송현동 달동네에서 기거할 때 우연히 동인천역을 지나며 배고픈 사람들이 비참하게 길거리에서 끼니를 때우고 밥 한 그릇 먹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줄 세우는 사람들의 인정머리 없는 잔소리를 들으면서 묵묵히 차례를 기다리는 노숙자를 보는 그의 맘이 편치 못했다. 게다가 배고픈 사람들을 앞에 세워 놓고 설교를 하고 밥과 국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기나긴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을 보며 너무 가슴이 아팠다.
서씨는 "밥을 먹은 후에 설교를 하면 전부 가 버리기 때문에 먹기 전에 해야 한다는 뜨거운 열정이 너무 슬펐다"며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대접이라는 것을 너무도 몰랐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주린 배를 채우는 분들에게 한 그릇의 밥보다 사람대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국수집을 차리기로 결심했다.
서씨는 민민운동을 한 고 제정구 의원의 글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판자촌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다 서울에서 시흥으로 집단 이주를 하고 '복음자리'라는 공동체를 일궈내는 활동을 했다. 그의 삶의 모토가 '야박한 정부지원금이나 생색내는 후원자의 돈을 받으려고 프로젝트 사업을 벌이지는 않는다. 그저 함께 산다. 남이 좋은 일을 할 때 옆에서 기꺼이 거들어준다'인데 이 원칙들은 민들레 국수집의 운영원칙이 되기도 했다.

그는 욕심이 많다. 또 매일 꿈을 꾼다. 꿈을 꾸며 고민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여 오죽하면 그의 딸 모니카는 "아빠 제발 꿈꾸지 마세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렇게 꿈을 꾸다 보니 2009년 7월에는 '민들레희망지원센터'라는 노숙인들을 위한 문화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동인천 삼치골목에 위치한 이곳 센터는 낮 시간 동안 노숙자가 쉬어 갈 수 있는 장소다. 이곳에서 노숙자들은 몸도 씻고 컴퓨터도 이용하고 책도 보며 쉬어 간다.
운영은 주로 그의 아내 베로니카(53)씨가 맡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곳에서는 매일 독서토론회가 열린다는 점이다. 노숙인들이 센터에 비치된 책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면 적지만 3천원의 현금을 나눠 주고 있다. 서씨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스스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이 보기가 좋아 계속하고 있다.
민들레 국수집이 5주년을 맞았을 때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따뜻한 가정과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조그만 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꿈꿨다. 그가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형제들을 만나고 노숙인에게 밥을 대접하며 느낀 것은 바로 어린 시절부터 보살핌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민들레꿈'은 5주년이 되는 2008년 4월 1일에 시작되었다. 그곳은 그의 딸 모니카(28)가 선생님으로 있다. 지난해 2월에는 어린이를 위한 밥집도 마련했다. 매일 20명 남짓의 어린이들이 이 오아시스 같은 공간을 찾아 맘껏 먹고 놀며 공부한다.

도우며 사는 것이 즐겁고 마냥 행복한 국수집 아저씨에게도 어려움은 있었다. "내 인생에 힘든 순간은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하는 서씨지만 그의 10대는 먹고살기에 급급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표현하면 맞을 거란다.
너무 흔한 이야기지만 도시락을 못 싸가는 것은 다반사였고 그것도 항상 보리밥이었다. "그때는 가난했지만 서럽지는 않았거든요. 지금은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과 그런 서러움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항상 배고프고 어려웠던 집안 형편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더욱 힘들어졌다.
그가 초등학교 1학년이고 막내가 갓 돌을 지났을 무렵 열차사고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큰 누님이 시집 간 이후에 여섯 형제가 어머니의 노동으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그나마 큰형님이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에서 교편을 잡게 되면서 살림이 좀 나아지나 했지만 형님이 곧 군에 입대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다섯 형제를 먹이고 입혔다.
학비까지 책임지기에는 그녀 혼자 너무 버거웠다. 한창 예민할 나이에 혼자 객지에 나가 돈을 벌면서 외롭게 지내기도 했다. 그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아니 불편했던 시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난보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번민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면서 그는 막연히 신부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수도원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 인천 만수동 수도원을 시작으로 서울 성북동 본원, 제주도 서귀포 수도원, 경기도 인천 수도원, 새남터 성당 등을 거치며 수사생활을 했다.
서씨는 새해 또 하나의 소망을 조만간 이루게 됐다. 바로 노숙자들을 위한 또 하나의 공간 '민들레가게'를 곧 오픈할 예정이다. 밥집 근처의 한 가게를 빌려 이미 도배도 다 끝냈다. 이곳에서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만 받고 판매할 계획이다.
서씨는 모든 사람이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정말 살 만한 세상이 되는데 그걸 못 한다고 안타깝다고 한다. '약간 멋지게'를 좇기보다 '약간 불편하게'로 삶의 목표를 바꾸면 좋겠단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편하면 죽는 겁니다. 우리는 다들 너무 편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어요. 약간 불편해지면 맘이 훨씬 편해집니다"라고 서씨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