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의정부/최재훈기자]"먹물이 내 몸에 스민지 30년. 작은 세월이 아니건만 발걸음도 빠르지 않는데 벼듬질 또한 무딘 가슴으로 수족에서 흘러나온 흔적들을 모아 보았다. 산의 맑은 정기를 계곡아래로 끌어내어 자연과 일상에서 동화 됨을 소재로 삼고…. 깊은 계곡속에 있다 하더라도 계곡이 깊은 만큼 더 높은 산을 볼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동양화가인 기평 손영락(59) 화백은 현재 몸 전신 연골파손이란 불치병과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산과 바위 등을 화폭에 담아내며 불치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과 불우한 이웃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동양화분과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손 화백은 1953년 경주 (월성)손씨 23대손 율동파 종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일보다는 글쓰기를 좋아해 어머니가 농사일을 하며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어린 시절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손 화백은 항상 주머니에 대나무 꼬챙이를 넣고 다니며 틈만 나면 땅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어느 날 좌우측 신경마비와 함께 40도의 고열로 의식을 잃게 된다. 병원에서는 뇌수막염이란 판정과 함께 '병을 고친다고 해도 두 눈이 실명될 수 있다'며 그림 그리는 것을 자제해 주길 당부했다.


그래도 그는 병마와 싸우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중·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1972년 홍익대학교 미술학과에 합격했다.

1년여 동안 그림에 열중하던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학교를 휴학하고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직성 척수염과 전신 경직으로 4년간 식물인간처럼 보내야 했다.

그러나 부모와 가족들은 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진한 가족애 덕분에 그의 몸은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

소생의 기쁨도 잠깐, 1997년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마저 2년 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기평은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부모님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다 돌아가신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불효를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기평은 '화가의 꿈은 나의 운명'이라 여기고 1980년 병약한 몸을 추스린 뒤 전라남도 광주로 내려가 남화의 거두인 의제 허백련 선생 문화생들의 모임인 연진회에서 사군자를 그리며 그림에만 몰두했다.

기평은 몸을 사리지 않고 그림에 몰두해서인지 1983년에는 원인 모를 병으로 인해 또다시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저혈압과 심장박동이 보통 사람보다 3배나 빠르게 뛰어 거동을 할 수 없었고 몸 전체의 연골파손으로 식물인간 신세가 된다.

기평의 모든 삶은 비관적이었다. 그러던 중 한 종교단체에서 우연히 지금의 아내인 구유선(51)씨를 만나게 된다.


기평은 "아내와의 인연으로 인해 세상 모든 것을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다"며 "아내의 지극정성 덕분에 불규칙적으로 뛰던 심장박동도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기평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래서 1988년 아내와 함께 의정부로 이사 와 '우리는 할 수 있다! 병을 이길 수 있다!'란 희망속에 굳은 몸을 추스르며 그림에 다시 몰두했다.

기평은 마음속에서 자유로이 뛰어놀고 싶은 산과 바위, 들판, 계곡 등을 화폭에 담는다. 작품을 통해 문명에 지친 영혼들이 잠자고 숨쉴 수 있는 곳이 자연이라 믿고 있다. 또 자연의 울림과 기운을 혼의 교향곡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거친 필묵은 바위의 곧고 강인함을 나타내고, 자연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 불우이웃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다. 또 30년 화업의 운명에서 얻은 인생사와 정신사를 투명함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결과 기평은 1990년 장애인 예술제에서 대상(문교부장관상)을 시작으로 KBS 전국 휘호대회 사군자부문 금상, 제1회 장애인미술대전 대상, 경기도 미술대전 특선 2회, 입선 9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2회 입선, 제5회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대상 미술부문 대상 등 대한민국 미술부문 거의 모든 상을 휩쓸었다.

기평은 1992년 의정부 진로백화점 개인전을 시작으로 그동안 10여회의 개인전과 초대전을 가졌으며, 2001년에는 신체장애를 딛고 일어선 그에게 미국(LA)으로 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미국 LA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둔다.

당시 외국 평론가들은 "기평의 작품을 감상하게 되면 산과 들에서 힘과 기가 느껴져 마음이 편해진다"며 "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먹의 흔적이 향수에 젖고 내 자신이 동심으로 돌아가 마음껏 뛰어놀고 싶은 생각이 들게한다"고 평했다. 또 "한국화의 참맛을 느낄 수 있고 먹의 성질을 잘 파악해 이를 활용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며 "외국 어디에서 전시해도 한국의 멋과 미를 보여줄 수 있는 손색 없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이런 평가속에 기평은 2001년 회룡문화제 심사위원, 2005·2009년 장애인 미술대전 심사위원, 2010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장애인 미술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환자들과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기평의 작업실에는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기평은 자신이 겪었던 암울했던 삶을 작품을 통해 병마에 지친 수많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희망을 던져준다. 또 각박한 삶에 찌든 수많은 현대인들의 아픔을 달래준다. 기평 손영락 화백은 "아픔의 상처에 사랑과 희망의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작품활동을 쉬지 않을 것"이라며 "그동안 가족과 이웃들로부터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주위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 소박한 꿈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