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이현준기자]'탈북여성 국내 박사 1호', '2010 미국 용기있는 국제여성상 수상자'.

이애란(48) 경인여대 겸임교수를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강의 준비에도 바쁜 그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설립한 (사)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의 원장, (사)하나여성회 대표이사 등의 역할을 맡으며 탈북자들을 위한 활동을 바쁘게 진행하고 있다. 탈북자로서, 다른 탈북자를 위한 활동과 후학양성에 힘쓰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사)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에서 만난 이 교수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는 28일 서울 종로구청에서 예정된 '북한이탈 주민을 위한 설 축제' 준비에 분주한 그의 표정은 활기가 넘쳐있었다.

그녀의 활동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일부러 활발하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왠지 모르게 끌려들어갔죠. 운명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라며 웃으며 운을 뗐다.

그는 이어 "한해에 탈북자들이 3천명 정도 들어온다. 지금까지 2만명 정도가 되는데, 이중 여성이 80%를 차지한다. 그런데 일자리가 없다. 취업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북한요리를 가르치면 일자리와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연구원과 부설 요리학원 설립이유를 설명했다.


# 착하고 얌전한 아이 이애란,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는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남들과 다름없이 컸고, 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그의 부모는 '온실의 꽃 같이 연약한 아이였다'고 했다고 한다. 공부를 재밌어하고 나름 부족함이 없던 유년생활을 보냈다.

그러다 11살 무렵, '삼수'지역으로 추방됐다. 그의 할머니가 한국전쟁 때 '월남'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는 삼수에서의 생활을 '천국과 지옥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평균기온이 영하 30도 가까이 되는 무척이나 추운 지역이었다. 전기도 없었다. 학교에 가니 공부는 조금만 시키고, 일을 많이 시켰다. 고사리와 감자 등을 심고, 또 캤다. 땔감용 나무를 해오기도 했다. 한번은 학교에 불이 났는데, 복구를 위해 흙을 나르고 잔디를 파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수학에 취미가 있었다. 지역학생 1만여명 가운데, 우리로 치면 경시대회반 격인 '소조' 25명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 진학에 반드시 필요한 학교장과 담임교사, 소년단장의 추천서를 받지 못했다. 월남한 사람의 손녀였던 출신성분이 문제였다. 그 충격으로 한때 '살아서 뭐하나'하는 생각에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전문대학 격인 경공업학교에 들어갔다. 식품영양학과의 연도 이 때부터였다. 이 곳을 3년간 다니고, 다른 학교로 편입했다.


난관은 다시 한 번 그를 찾았다. 이번엔 미국에서였다. 미국에서 소설가 활동을 하고 있던 그의 친척이 낸 소설 때문이었다.

그의 가족을 소재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이 소설은 자신과 그의 가족의 실명, 편지 등이 그대로 게재돼 있었다. 가뜩이나 출신성분에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이 소설로, 그의 가족은 정치범으로 몰릴 처지가 됐다. 결국 그는 돌이 지나지 않은 아들 등 9명의 가족과 함께 남쪽행을 선택해야 했다. 1997년도였다.

# 쉽지 않은 남쪽 생활 속 조심스런 성공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남쪽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호텔 청소, 신문배달 등의 일을 했지만, 생활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한 생명보험 회사의 보험설계사 일을 하게 되면서 그는 능력을 발휘했다. 사내 6만여명의 설계사 가운데 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본인만 열심히 하면 밥을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된다는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됐다.

그는 더욱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토끼탕과 관련한 건강음식 특허를 받아 음식점을 열었다.

그를 '박사'까지 이끌었던 학업제안도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들어왔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가정을 이끌어야 했기에 그 제안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등록금 문제가 장학금으로 해결되면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과정에서 음식점 운영은 포기해야 했다.

(사)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을 설립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행히 잘 풀렸고, 탈북자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부설 학원도 차렸다.

지난해엔 미국 국무부가 수여하는 '용기있는 국제 여성상(Award for International Women of Courage)'을 받기도 했고, 경인여대에서 식품영양에 대한 강의도 진행하게 되는 등 국내에선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는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게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목숨을 걸고 지켜낼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다"라고 말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 등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미안하더라. 북한사람들을 증오하게 했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는 이어 정부의 단호한 대응을 주문했다.

남한에서의 생활 15년차. 활발한 사회활동. 그에겐 조금은 특별한 앞으로의 계획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시민으로서 맡은 일과 본분에 충실하게 살아갈 생각이에요. 거창하지 않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필요한 일보다는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것'. 그가 삶을 살아가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환하게 웃는 그의 표정엔 자신감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