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정진오기자]'조국의 미래이며 빛나는 희망의 별이었다'.

1959년 8월 2일 '조봉암 구명위원회'(일본 도쿄)는 죽산 조봉암 선생의 처형 직후 발표한 조사(弔辭)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조봉암 구명위원회'가 죽산을 이렇게 높게 평가한 것은 '죽산 사상'이 대한민국의 장래를 담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죽산 사상'은 1956년 11월 10일 서울 시립극장에서 행한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죽산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시에 거부한다고 다시 한 번 선언한다. 죽산의 이상은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는 '복지사회 건설'이었다. 또 완전한 '자주·평화·통일 국가 건설'이었다.

서울대 박태균 교수는 죽산의 정신을 '한국적 제3의 길' 내지는 '한국적 개혁주의'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싸잡아 비판하면서 새로운 제3의 노선을 추구한 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죽산이 처형되지 않고, 그의 사상이 정책에 반영됐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 교수는 "죽산은 반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이나 세계의 변화하는 상황에 잘 대처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죽산이 평화통일을 외쳤지만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해도 북한과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공산주의와 결별한 죽산에 대해 북한에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래도 죽산은 북한과의 대결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단정했다.

진보당원이기도 했던 정태영은 1991년에 낸 '조봉암과 진보당'이란 책에서 '폰 바이체커 독일연방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우리의 통일에 있어서도 첫째 민주주의의 철저한 실천, 둘째 사회정의의 실현, 셋째 서로를 이해하려는 사심 없는 교류의 증대 등이 요청되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은 이미 50년 전에 이 같은 세계사적 변혁원리를 간파했으며, 민족이 강대국의 농락 대상이 되지 않고 민족자존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비미비소 노선을 제시한 바 있다'고 썼다.

죽산의 사상은 2011년 시점에서 평가해도 여전히 '선진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