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신창윤기자]'정상에 있을 때 떠난다'.

지난 2000년 4월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던 박지성(30·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한국인 최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선수라는 타이틀과 월드컵 3회 연속 득점의 금자탑을 세우고 11년 만에 대표팀 유니폼을 반납했다. 2011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통해 A매치 100경기(13골)를 채우며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박지성은 말 그대로 후회 없는 대표팀 생활을 마치고 제2의 축구 인생을 준비하게 됐다.

■ 은퇴 배경

박지성이 대표팀 은퇴를 생각하게 된 것은 좋지 않은 무릎 상태 때문이다. 2003년 아인트호벤(네덜란드) 시절 오른쪽 무릎의 반월형 연골판 제거 수술을 받았던 박지성은 2007년 4월 오른쪽 무릎 연골 재생 수술을 받고 9개월의 힘겨운 재활을 견뎌냈다. 또 2009년 10월 세네갈과 평가전을 마친 뒤 오른쪽 무릎이 부어올라 위기를 맞았으며, 지난해 10월 무릎통증으로 한·일전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은퇴설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때문에 박지성의 아버지인 박성종씨는 지난해 12월 대표팀 전지 훈련 때 "아시안컵 이후 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는 (박)지성이의 생각이 확고하다. 의사도 박지성이 오랫동안 비행기를 타면 수술했던 무릎에 물이 찰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언급했다.

후배 양성도 대표팀 은퇴의 또다른 이유다. 박지성은 지난해 7월 박지성 축구센터 준공식 자리에서 "유소년 축구센터를 통해 유망주를 발굴하고 싶다. 리그 휴식기에 한국을 찾아 유망주들과 호흡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 박지성이 걸어온 길

박지성이 걸어온 길이 처음부터 순탄하진 않았다. 수원 세류초·화성 안용중·수원공고를 마친 박지성은 다른 대표팀 선수들이 밟았던 엘리트 코스와 분명 달랐다. 체구가 작아 상대 선수가 밀면 넘어지기 일쑤였고, 연고팀인 프로축구 수원 삼성도 그를 외면했다.

하지만 박지성은 1999년 2월 명지대 입학을 앞두고 당시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던 허정무 감독과 '테스트 선수'로 인연을 맺었다. 허 감독은 당시 그라운드의 모든 구석을 누비던 박지성의 심장에 감탄했고 대성할 가능성을 간파했다. 박지성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마침내 힘껏 떠올랐다. 박지성은 조별리그 포르투갈과 3차전(1-0 승)에서 천금같은 결승골로 한국의 사상 첫 본선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박지성은 이후에도 한국 대표팀의 중원을 든든히 지켰다. 특히 큰 무대에서 세계 축구 강호들의 골망을 잇따라 흔들며 3회 연속 월드컵 본선 득점 기록을 세우는 등 한국 축구사에 큰 획을 그었다.

■ 아시아 축구의 아이콘

한국 축구가 좁은 아시아 무대를 박차고 세계무대에 떳떳하게 나설 수 있었던 건 박지성의 출현이 컸다. 유럽 최고의 무대, 최고 팀에서의 활약상은 개인 영광을 넘어 한국과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대변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과 인연은 드넓은 유럽 대륙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때부터 박지성은 한국 축구의 아이콘을 넘어 아시아 축구의 자랑으로 거듭났다. 월드컵을 마치고 곧바로 히딩크를 따라 네덜란드 프로축구 PSV 아인트호벤으로 건너갔고 2005년에는 세계 최고 클럽인 잉글랜드 프로축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전격 입단했다.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니폼을 입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정규리그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 제패를 일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