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뒷모습은 처음부터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
오산시 청학동 건축사사무소 동성건축 사무실에서 만난 정씨는 최근 발급된 건축사 자격증을 들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조심스럽게 내보이는 자격증은 깔끔한 액자에 담겨 있었다. 천천히 자격증을 어루만지는 모습은 흡사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듯했다. 정씨는 "남들이 볼 때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지만 여기엔 내 꿈과 지금까지의 삶이 몽땅 들어있다"고 말했다.
■ 인생의 목표는 항상 내 앞에 있었다=건축사 도전은 그를 숨쉬게 하는 인생 그 자체였다. 스스로도 "건축사 시험은 나를 시험하는 인내의 장이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로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고 누차 강조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듯이 실용적이면서 마음이 따뜻한 건물을 짓는 게 내가 건축사로서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말을 이었다.
정씨는 1977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또래 아이들과 함께 사건(?)을 몰고 다니는 골목대장이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다가도 놀이시설과 벤치 등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삽질(?)을 해서라도 자리를 옮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지독한 말썽꾸러기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유년시절부터 공간을 설계하는 남다른 소질을 갖춘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조금 이른 나이인 열 살때 정씨는 자신의 인생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건축사란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니 넌 나중에 커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 주위에서 귀가 따갑도록 떠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집안은 2대 건축사 집안으로 건축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어린 정씨에게는 집안 내력이 오히려 큰 부담으로 다가와 방황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자주 부딪히는 등 학교의 문제아로 부상한 적도 있다.
그러다 한 선배로부터 "미래를 책임지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란 말을 들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듯한 큰 충격이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이 시작됐지만 해답은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순순히 잡히지 않았다.
목표를 정하지 못해 하루하루를 나태하게 보내고 있을 시기에 수원과학대학에서 건축과 교수로 재직중이던 아버지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의 제자들과 유럽으로 선진 건축 관련 현지 답사를 가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언제 들어도 설레는 해외여행이라는 말에 흔쾌히 아버지의 제안에 응했다. 답사는 그의 인생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그는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루브르박물관이 뿜어내는 건축미에 눈과 마음이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다. '대를 이어 건축사가 되자'. 자신의 인생 최대 목표는 그렇게 정해졌다.
■ 3대 건축사 달성은 1차 관문=정씨에게 건축사 자격증은 한때 고뇌의 대상이었다. 건축사 시험 응시조건인 5년의 실무 경력이 그에게는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하루 하루 바쁜 회사 생활에 건축회사에서 실무 경력을 쌓고 있을 당시 어렵게 결혼에 성공했지만 상황은 그다지 녹록지가 않았다.
회사 생활과 건축사를 향한 시험 공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정을 꾸려가야 할 가장으로서 인생의 고단함과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은 시기였다. 일에 치이는데다 생계 고민까지 겹치며 매일 3시간 정도밖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당연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지만 '날 믿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떳떳한 남편, 아버지가 되자'는 일념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하늘은 노력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았다. 20년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은 건축사 자격증을 2년여간의 시험준비 끝에 드디어 손에 넣었다. 동시에 3대 건축사 집안을 전국 최초로 이루게 된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원에서 정은용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대한건축사협회 경기도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건축사의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다.
아버지 정구영(64·건축사사무소 동성건축 대표)씨는 1969년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건축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2대 건축사 집안의 탄생을 알렸다.
아버지가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할 당시 건축사 자격증은 하늘의 별따기와 마찬가지로 어려웠다고 한다. 응시자 수천명 가운데 합격자는 30명 안팎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경기도정 자문위원과 수원시 공동주택입지 심의위원회 전문위원, 경기도 지방세 심의위원, 시흥·오산시 건축심의위원, 수원과학대학 건축학과장 등 다수의 건축관련 심의위원과 조정위원을 맡으며 건축 후배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건축사로서 첫발을 내딛는 정씨의 각오는 남다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력이 강한 수원을 떠나 오산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건축사로서 그의 도전은 미와 실용성, 여기에 마음을 더해 건축물을 따듯한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정씨는 "건축사는 1차 관문일 뿐 나의 도전은 이제 시작되는 것"이라며 "내가 추구하는 것이 이상일 수도 있지만 인간은 언제나 꿈을 꾸면서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왔고, 나 역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건설경기 침체에 대해서는 "정부는 물론 모든 건축업계 관련자들이 함께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라며 "아무리 힘들어도 내 인생에서 희망을 꺾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