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강승훈기자]엄마의 뱃속에서 10개월을 보낸 뒤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의 울음소리는 그리 힘차지 않았다. 가족 조차도 검은 피부에 바싹 마른 아기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여느 신생아와 확연하게 달랐다. 태어난 지 7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목을 가눴다. 걸음마는 만 두살이 되도록 온전하지가 못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당시에는 의사소통조차 불편했다. 주위에서는 이런 그에게 정신병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부모는 희망으로 키웠다. 그러다 12살이 되던 해 지적장애 판단을 받았다. 그것도 가장 나쁜 1급이었다. 일상에서 적응이 힘들어 평생 보호가 필요한 수준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동안 성적은 항상 바닥에 머물렀다. 거의 꼴등이었다.
20년이 넘도록 혼자만의 세상에서 지내던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접하면서다. 비록 장애인 스포츠 분야지만 얼마 전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아쉽게도 세계 기록에는 불과 2초가 모자랐다. 이제 다음달이면 정식 대학생으로 거듭난다. '3전 4기' 도전으로 대학 합격증을 거머쥔 것이다. 장애를 극복한 주인공은 정승호(인천 중구 북성동·21)씨다. 이제 정씨를 아는 이들은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라고 부른다.
아버지 정성근(62)·어머니 이희순(55)씨는 가정과 식당에 LPG(액화석유가스)를 팔아 살림을 꾸렸다. 직업은 지난 20년 동안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먹고 사는 게 힘들어 늦은 밤 시간에도 주문 전화가 걸려오면 직접 배달에 나섰다고 한다. 크고 무거운 가스 용기를 지고 날랐다. 임신 사실을 안 것은 그를 가진 뒤 3개월이 흘렀을 무렵이다.
"승호 이전에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산부인과에서 한쪽 나팔관이 막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둘째 자녀는 갖기 무척이나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지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돈을 벌기 바빴어요. 그러던 차에 승호가 덜컥 들어섰던 겁니다."
어머니 이씨는 1991년 봄을 이렇게 회상했다. 밥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메스꺼웠다. 임신 존재를 몰라 체했을 것이라 착각, 탄산음료를 마셨다. 게다가 태아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가스를 곁에 두고서 살았다. 이후 우연히 찾은 내과에서 임신을 확인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단다. 남편 역시 현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부모는 이내 축복이라 여겼다.

그해 10월 그가 태어났다. 출생 때 몸무게가 2.9㎏이었다. 그야말로 평범했다. 반면 병원에서는 아이에게 잠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요구했다. 초등학생으로 성장하도록 또래에 비해 뒤처졌다. 한글을 확실하게 익히지 못했다. 덧셈, 뺄셈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 입장에서는 상태가 나아질 것으로 판단,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진학시켰다. 부모의 욕심이라는 것은 나중에 깨달았다. 그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갔을 때 결국 문제가 터졌다. 동급생에 따돌림을 당한 것이다. 매일 돈을 빼앗겼고 구타를 당했다.
"언젠가는 승호가 학교 갈 시간이 지나도록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학교에 가기 싫어 문을 잠근 것이죠. 한참을 설득한 끝에 등교를 함께 했어요. 평소 승호는 학교를 가지 말라는 것을 체벌이라고 여길 정도로 학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너무도 안쓰러웠다. 이 사태가 학교 전반에 공론화되면서 승호를 괴롭혔던 모 학생은 퇴학을 당했다. 그럼에도 부모는 당시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저리다.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그렇게 장애아로 아무 탈(?)없이 지내던 2008년 12월 인생의 반전을 가져다 줄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중구장애인종합복지관이 문을 연 것이다.
고교 2학년 시절 승호는 184㎝ 키에 100㎏를 육박하는 거구였다. 장애를 앓으며 고도 비만이 생겨났고 우울증에 대인기피증으로 확대됐다. 운동은 전혀 몰랐다. 가까이서 승호를 지켜보던 복지관내 사회복지사의 눈에 들며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하루 6시간이 넘게 유산소 및 근력운동을 병행했고 6개월간 10㎏를 감량했다. 그토록 매사에 소극적이던 승호의 태도가 달라졌다. 침울했던 얼굴 표정은 밝고 웃음이 번졌다.
정씨가 복지관에 들어온 뒤 4개월이 지났을 때 국내 대회에 첫 출전했다. 2009년 3월 열린 '인천시교육감배 장애청소년 육상대회'에 선수로 나선 것이다. 포환과 원반 종목에 나가 금메달과 은메달을 1개씩 획득했다. 놀라운 쾌거에 주위는 물론이고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너무 급작스런 결실은 오히려 지나친 열정과 승부욕으로 그에게 방해로 작용했다. 뒤이은 출전에서 거푸 고배를 마셨다. 예선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았다. 짧은 기간에 온 슬럼프는 극복이 힘들었다.

극단의 처방으로 2010년 5월 종목을 조정으로 바꿨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전보다 더한 승부욕이 생겼다. 정확히 7월 17일이다. 육상에서 종목을 바꿔 출전한 '2010 하계전국장애인조정대회'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때 1위와는 불과 8초 뒤진 기록으로 결승선을 넘었다. 이를 계기로 자신감을 회복, 같은해 9월 대전에서 열린 '제30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LTA-ID 경기에서 3분 23초대 성적으로 대회 신기록이자 한국 신기록에 랭크됐다. 정씨는 지금도 하루 일과를 체력 단련으로 연다.
그렇지만 정씨는 이달 말이면 정든 복지관을 떠나야 한다. 지난달 충남 서산에 위치한 나사렛대학으로부터 신입생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순수 면접으로 특수체육학과에 들어갔다. 불가피한 기숙사 선택으로 가족과 복지관에서 멀어져야 할 상황이다. 본인보다 적은 나이의 학우들과 공부로 경쟁해야 할 정씨는 학내 스포츠단에서 운동을 지속한다는 구상이다. 미래 스포츠 지도자와 조정 국가대표로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포부다.
앞으로의 캠퍼스 생활이 설렌다는 정씨는 "지금껏 엄마, 아빠와 떨어진 적이 없어서 약간은 두렵지만 1주일에 한 차례 꼭 만나기로 약속했다"며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를 이뤘으니까 여자 친구를 만드는 게 당장 이뤄야 할 꿈"이라고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