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위해 작전을 세웠다는 설봉산성길. 역사속 숨겨진 이야깃거리가 많은 길로 시민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경인일보=글┃이천/서인범기자] 이천에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은 없다. 그렇지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고 걷기 좋은 가벼운 산행 길이 많다. 그 중에서도 설봉산의 설봉길은 부담스럽지않은 높이에다 산세가 수려하고, 역사 속 숨겨진 이야깃거리도 많아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묘한 매력에 취하게 된다.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어도 좋지만, 홀로 이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길이 전해주는 포근함을 맛볼 수 있다.

# 솔향기따라 굽이굽이, 신라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의 대업을 꿈꾸었던 이천의 진산인 설봉산(雪峰山·394m)은 험준하지는 않지만 8봉3계곡2능선이 사시사철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설봉길은 통상 설봉공원 입구에서 시작한다. 설봉공원은 도자기엑스포가 열리는 경기도 세계도자센터와 마주하고 있어 도자기의 도시 이천을 한번쯤 찾은 이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설봉길 코스는 크게 5코스로 나뉜다. 그러나 길을 걷다 보면 여러 갈래 의 샛길이 많고, 위험한 지형이 아니기 때문에 두세번 정도 걷다 보면 나만의 코스를 만드는 재미도 만끽할 수 있다.

이번에 택한 코스는 1코스로 제1주차장-호암약수-설봉산성-칼바위-희망봉정상-화두재-구암약수를 통해 내려오는 5.3㎞ 코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가장 즐겨찾는 코스로 꼽힌다. 이외에도 4개 코스가 더 있는데 가족과 함께 한다면 설봉산성-삼형제바위-영월암-생태관찰로로 이어지는 코스도 권할 만하다.

▲ 설봉산성을 지나 솔향기가 물씬나는 노송길을 걸으면 모든 잡념을 한번에 날려주기에 충분하다.

설봉산에는 맑은 물의 생수를 마음껏 들이켤 수 있는 약수터가 무려 여덟 곳이나 된다. 이번에 찾은 길은 호암약수에서 시작해 가장 약수맛이 좋다는 구암약수로 이어져 어찌 보면 약수를 찾아 떠난 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큰 무리가 없는 길이라 땀 씻을 수건 하나면 족하다.

이천 설봉공원 입구에 들어서 구 현충탑 오솔길로 들어서자 모든 잡념을 한번에 날려줄 솔향기가 한가득 퍼져나온다. 초등학생 때 난로 피우기 전 불쏘시개로 솔방울을 따러 학교 뒷산을 헤매던 소나무숲을 접하게 되면 벌써 옛 이야기가 절로 흘러나온다.

남자들의 군시절 만큼 재미난 방공호이야기, 고자박, 송충이, 솔잎, 소나무의 죽은 가지 삭장구 등으로 시골생활 이야기를 시작하면 함께 간 도시인들은 진짜 그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다시금 쳐다본다. 이야기를 마칠 때쯤이면 솔밭길을 다 지나와 어느새 호암약수터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이천시민들이 운동삼아 물을 길어먹는 약수터로 주로 노인분들이 많이 찾는다.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에 등을 치는 전통 안마 시술법을 행하는 어르신부터 등짐 가득 식수통을 짊어지고 부리나케 하산하는 젊은 어르신들, 이천시 대표 프로에 견줄 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이 선보이는 아마추어 셔틀콕이 성황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잠시 목을 축여야 앞으로 약간의 경사코스를 무난하게 산행할 수 있다. 경사진 길을 20여분 걷다 보면 이번에는 설봉산성을 만나게 된다.

▲ 설봉길을 찾은 시민들이 호암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있다.

설봉산성은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을 위해 작전을 세웠다는 곳으로 이 길을 걷다 보면 옛 신라인으로 되돌아가고픈 마음이 든다. 설봉산 일대는 넓은 이천들판을 배후에 두고 한강유역으로 전진하려는 신라와 이를 저지하려던 고구려, 백제가 쟁패를 벌이던 요충지였음을 입증하려는 듯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산성벽을 따라 올라서면 350m봉에서 시야가 트인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북쪽으로 가까이 보이는 이천에서 가장 높다는 원적산의 천덕봉(630m)과 원적봉(563m), 남동쪽 장호원 일대 넓은 이천들판을, 동으로는 여주 아래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복하천변들도 광활하게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중부고속도로와 도드람산이 지근 거리에 보인다.

이에 설봉산에는 산성터가 여러 군데 보인다. 성터는 많이 무너져서 남아 있는 곳이 몇 곳 안 된다. 최근에 한 부분을 복원해 성의 모습을 일부 되찾았지만 성의 정확한 모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산성터는 설봉산의 명물인 칼바위 부근에 있다. 이곳에는 봉화대도 복원돼 있으며 남천정의 일부인 장대가 서 있었던 곳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다. 이천시가 내려다보여 조망이 좋은 곳이다. 북쪽마저 훤히 트인 이곳 망루에 서서 남북의 적을 조망하던 옛 장수의 기개를 흉내내기는 어렵지 않다.

# 영월암을 지나 희망봉에서 희망을 외치다

성터를 지나 10m쯤 가면 해마다 이천시민들이 해돋이를 관망하며 새해 소원을 빌던 칼바위가 나온다. 이쯤이면 힘든 산행은 끝이지만 설봉산의 아기자기한 맛을 느끼려 영월암 산길로 접어들었다.

내리막 코스로, 순탄하고 굽이굽이 동물 내장과 같은 길을 택해 몰아치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영월암(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에 닿는다. 이곳에서는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822호 영월암 마애여래입상과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는 석조 광배 및 연화좌대를 만날 수 있다. 암자에 들어서면 나옹화상이 심었다는 수령 640년의 은행나무를 보며 그 정기를 느낄 수 있다.

▲ 호암약수터 인근 체력단련장에서 한 시민이 운동을 하고 있다.

이어 10여분 정도 약간 등에 땀이 나는 정도 걸으면 호랑이에게 쫓기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삼형제가 수십길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렸는데 그순간 바위가 됐다는 효행의 삼형제바위를 만날 수 있다. 이 삼형제바위는 이천시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다. 가족과 동행한 산행이라면 형제간 우애와 효성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테마가 있는 길이 될 듯하다.

삼형제바위를 지나 다시 정상 희망봉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길 삼십분. 설봉산 희망봉 정상에 도착하면 이천시내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광경을 만끽할 수 있다. 고성능 카메라가 있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이천의 변화되는 모습을 담아 간직해 볼 만도 하다.

하산길은 부학루를 거쳐 화두재를 따라 시립박물관 쪽을 택했다. 화두재로 가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 비탈길로 험하지 않지만 바위들이 불쑥 튀어나와 자칫 뛰기라도 한다면 넘어져 다치기 십상이다.

화두재를 지나 구암약수를 찾아 약수로 입가심을 하면 오늘의 산행도 마지막이 된다. 구암약수를 따라 소나무숲을 거쳐 나오면 경기도 세계도자센터가 우리를 맞는다. 세계도자센터는 산과 호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설봉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각종 도자관련 시설을 갖추고 있다. 도자기 관람을 마치고 설봉산 하단에 있는 설봉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을 체험할 수 있다.

산행 후 뭔가 아쉽다면 온천에 몸을 담가 보는 것은 어떨지. 이천온천은 500년 이어온 유서 깊은 온천으로 한 농부가 사시사철 솟아나는 더운 샘물을 기이하게 여겨 눈을 씻었더니 눈병이 말끔히 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온천욕을 마치고 출출하다 싶으면 식도락가들은 한번씩 가보았다는 산업도로 주변 명물 이천쌀밥집을 추천한다. 이천쌀밥을 주 메뉴로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이 가득한 정식은 설봉길 코스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그야말로 딱이다.

※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