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사진┃조성면(문학평론가·인하대 강의교수)]철도와 문화는 아직 살짝 낯설다. 철도는 교통수단이며 기계일 따름이지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철도는 대체로 희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기관차, 통근열차와 수도권 전철, MT갈 때 타던 경춘선 등 몇 개의 이미지로 고착화돼 있다.
"할아버지의 시대는 경제를, 아버지의 시대는 정치를, 그리고 자식의 시대가 되면 문화를 생각한다"는 토마스 만(1875~1955)의 말대로 어느새 우리도 경제개발시대와 민주화운동시대를 거쳐 문화시대를 맞이하였다. 당연한 말이다. 맹자의 말대로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생기고, 먹고 살만해야 삶의 여유와 마음의 풍요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레포츠·한류·문화콘텐츠산업 등 문화담론들이 차고 넘치는 이 문화의 세기에 철도문화란 무엇이고, 어떤 문화가 필요한지 생각해보게 된다.
문화는 수많은 정의를 지닌 악명 높은 개념이다. 문화가 농업과 경작에서 파생되어 나왔다는 어원학적 설명에서 '삶의 총체적 양식(the whole way of life)'라는 문화유물론의 명제에 이르기까지 그 정의만 해도 200여개가 넘는다. 요리에 대한 백 마디 말이 단 한번 시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문화에 대한 수백마디의 설명보다 직접 피부에 와닿는 생활 속의 사례가 있어야 할 터이다.

패션문화가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번잡하고 불편한 속옷들로부터 20세기 여성들을 해방시켜 주고 그들에게 몸의 자유와 아름다움을 선사한 가브리엘 샤넬의 새로운 패션문화야말로 여권신장에 기여한 생활혁명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는 그 선구성과 역사성은 없고 그저 고가의 브랜드로만 남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철도의 등장은 여행 문화와 패턴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 속박돼 있었던 인류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일거에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특히 범선과 무역이 주도하던 상업자본주의와 해양교통시대를 마감하고 육상교통시대와 산업자본주의 시대로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견인차가 바로 철도였기 때문이다. 철도를 역사학이 아닌 이면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칫 문화적 근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철도는 문화이다. 우선,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런던역·암스테르담 중앙역·도쿄역 등 세계의 철도역들을 꼽을 수 있다. 또 세계 최초의 증기엔진인 리차드 트레비딕(1771~1833)의 페니다렌호를 비롯하여, 리버풀~맨체스터 사이를 오가며 최초로 철도 상용화의 전범이 된 조지 스티븐슨(1781~1848)의 로케드호, 증기기관차로서 세계 최고 속도 기록을 가진 마라드호 등 철도사를 장식한 다양한 차종들과 디자인이 그러하다. 이들 중에서 페니다렌호는 1808년 '누구든 잡을 테면 잡아보세요(Catch me who can)'란 재미있는 이름의 기차로 개량되었으나 세계 최초의 열차 탈선 사고를 냈다는 오명을 남기고 결국 박물관으로 퇴출되었다.

경인선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철도 역시 독특한 철도문화를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 도입된 각종의 기관차들이 있었으며, 유럽풍의 서울역과 근대적 건축의 발달 과정을 잘 보여주는 지방의 간이역들이 그러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운행된 기차인 모걸(1898)을 비롯하여 터우(1907)·1920년 미카와 파시 등이 도입, 운영되었고 부산~봉천간 특별급행 히카리(1933)와 특급 경부선 열차 아카츠키(1936) 그리고 우리 손으로 영등포공장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조선해방자호(1945) 등 기관차들이 각별히 눈길을 끈다. 그런가하면 1908년 서울~부산간 직통열차 융희호(隆熙號)는 순종 황제의 연호를 따라 상행선을 '융'으로, 하행선을 '희'라고 구별해 부르는 독특한 작명법을 보여주었다.
'한국철도100년사'(1999)나 '철도주요연표'(2002) 등 문헌들의 이면을 살펴보면, 타율적으로 맞이한 철의 역사에 대한 열패감과 어떻게든 이를 정당화하거나 객관화하려는 민족주의 같은 정치적 무의식이 깔려 있음이 엿보인다. 조선해방자호에 대한 특별한 강조라든지 한국인 철도사업가 박기종(1839~1907)에 대한 과도한 평가 등이 한 예다.

박기종이 중요한 근대사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철도 부설에 대한 의지가 드높아 1899년 왕족인 이재순과 함께 '부하(釜下)철도회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부하철도회사는 부산과 하단포를 연결하는 철도부설 사업에 집중하였기에 붙은 이름이다. 분명 애국심의 발로이긴 했지만, 바람막이로 왕족을 끌어들이고 1876년 병자조약 당시 일본어 통역관으로 참여한 인연을 활용하여 일본인들과 친분을 넓히고 이를 바탕으로 석유와 광목치마를 팔아 큰 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 그는 사업적 수완이 뛰어났던 기업가였다. 철도를 문화의 코드로 읽고, 이면을 꼼꼼히 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철도사의 안팎을 잘 아울러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철도문화는 많이 아쉽다. 붕어빵 같이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이어서 심미적 지루함을 주는 한국의 철도역들, 특히 빈약한 수도권 전철역사(驛舍)들이 그렇다. 지역성이나 역사성에 대한 건축학적 배려가 없이 그저 경제성과 편리성 등만을 고려한 낮은 실용주의 역사들은 성장과 개발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고 그저 앞으로만 내달려온 압축고도성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인 지금도 우리에게 철도는 여전히 문화가 아닌 교통수단일 따름이다.

한국철도의 서막을 연 경인선, 그리고 경기 네트워크의 원조인 수여선과 수인선에 대한 문화적 배려는 많이 미흡하다. 한국근대사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수원역의 수인선 급수탑·고색동 협궤노선·야목역 역사·고잔역 협궤 잔선·송도역 역사 등 젊은 근대문화 유산들에 대해서 이렇다 할 보호조치도 없고 안내판이나 표석 하나 없다. 물론 수원역 인근에 수인선 세류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고잔역과 소래역 주변에 야외공원과 기차 등이 전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아름다운 소래포구에 고층 아파트 건축을 허가해 주는 것을 보면 우리 문화 의식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문화의 시대이다. 항산이 항심과 문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가 항심과 항산을 만들어내는 시대다. 문화마인드가 절실하다. 철도는 문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