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정진오·목동훈·임승재기자]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있어서는 안 될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지 40년도 안 돼 정묘호란(1627)이, 그리고 그 10년이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1636)이 다시 터졌다. 조선의 백성들은 불과 50년 사이에 3차례의 전쟁을 치른 것이다.

고려 때 여몽전쟁의 상처가 아물어가던 강화도는 또다시 두 호란의 중심지가 된다. 한국 최초의 문화원 잡지로 평가받는 강화문화원의 기관지는 병자호란의 참화를 주요 기사로 다루고 있다. 1948년에 나온 향토지 '江華' 제1호에는 정삼학씨가 쓴 '강화와 전란'이란 글이 실렸다. 여기에선 896년의 '궁예란'에서부터 여몽전쟁, 정묘·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강화지역과 관련 있는 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이중에서 병자호란의 비중이 가장 크다. 글쓴이는 병자호란을 일컬어 '강화의 전란사상 가장 참담한 비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뭍에서 떨어진 강화도가 병자호란의 참화를 직접 겪어야 했던 이유는 당시 정권이 강화도를 '키포인트'로 여겼던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1592년 4월14일 왜군이 부산성을 함락시킨 뒤 보름 만인 4월30일 국왕인 선조는 궁성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한성은 온통 피란소동이었다. 한성 백성들은 강화도를 피란지로 택했다.

'신편 강화사'는 '도성이 함락된 직후 강화를 중심으로 한 인근 도서지역에는 한성에서 피란 나온 사람들이 피란선을 동원, 외양에 떠있는 선박들이 수백 척에 달했고, 강화·교동·인천·남양 등지에는 일시 운집한 피란민들로 인해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을 빚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화가 피란의 최적지가 된 것은 바닷길이 사방으로 통해 위급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곧장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왕들은 강화의 이런 점을 왕실 보존의 적지로 생각했고, 정묘·병자호란은 실제로 '강화'가 핵심 고리였다. 정묘호란은 왕이 강화도로 옮겨 이겨냈으며, 그러나 병자호란은 강화도 피란길이 막히는 바람에 남한산성의 치욕을 당해야 했다. 강화도에 누가 먼저 가느냐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산성. 병자호란(1636년 12월) 당시 조선 인조와 대신들이 피신해 청나라 군대와 싸웠던 곳이다.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에서 항복했다.

연구자들은 이를 '강화도 신드롬'으로 부른다. 조선의 왕들은 전쟁이 나면 한양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하면 된다는 생각만 했다는 얘기다.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연구의 권위자 한명기 명지대 교수는 정묘·병자호란을 '치욕' '고통' '공포'란 말로 표현하면서 '고통'의 예를 강화에서 들고 있다. 청나라 군사가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안전하다고 여겼던 강화도가 함락됐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인조는 급기야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인조가 무릎 꿇기 1주일 전 강화에선 대참극이 빚어졌다.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잇따라 자결했으며, 여인들은 청군의 능욕을 피하려 바다에 투신했다. 바다 위에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낙엽처럼 떠다닐 정도였단다. 사로잡힌 강화도 여인들은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 두 차례의 호란(胡亂)은 막을 수 없던 것일까.

10년 사이 잇따라 터진 정묘·병자호란은 임진왜란이 낳은 또 다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대비만 제대로 했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낸 뒤 4년 만에 정묘호란이 발생했지만, 정권의 무능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던 전세를 역전시킨 것은 잇단 개혁조치였다. 파격적인 신분상승제도인 면천법 시행과 조세정의 실현 등과 같은 개혁입법은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인 의병의 활약을 불러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그만이었다. 조선정부는 사회발전을 위한 여러 조치들을 뒤엎고, 국가 시스템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렸다. 병자호란 때 의병이 봉기하지 않은 이유로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은 또 외교 시스템도 무너져 있었다. 1623년 광해군 축출 뒤 긴박한 주변 국가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살피지 못했다. 명나라와 후금, 일본 등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당시 정권의 실력자들은 떠오르는 후금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으려 했다.

역사학자 이덕일씨의 시각을 빌리면, 정묘·병자호란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가장 큰 원인 제공자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의 현실적 외교관이 못마땅하던 세력을 등에 업고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인조는 논공행상에 실패하면서 내란에 휩싸였다. 1624년 1월의 '이괄의 난'이다. 이 때도 인조는 충남 공주로 도망친다. 왕들이 툭하면 서울을 버리는 게 습성이 된 듯하다.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주했고, 한윤은 1627년 1월, 후금군의 선봉이 돼 압록강을 건넜다. 세자를 전주로 보내고, 인조 자신은 강화도로 피신했다. 의병도 일어나지 않고 왕을 호위할 병사들도 모이지 않자, 인조는 불과 2개월 만에 강화도 연미정에서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은 아우가 된다는 '정묘약조'를 맺었다. 결국 정묘호란은 인조 정권의 무능을 만천하에 알린 셈이 됐다.


인조를 겨냥한 봉기가 잇따르는 등 내부의 소란도 끊이지 않았고, 후금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몽골족을 병합한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비하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청과의 전쟁불사론이 거세게 일었다. 그러나 싸울 힘이 없었다. 정묘호란 이후 국방력 강화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1636년 12월9일, 청 태종은 12만 병력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숨으려 했으나, 청군은 이미 길목을 차단했다. 인조는 전쟁이 나면 강화도를 피신처로 삼는다는 점을 청군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637년 1월 말까지 강화도를 비롯한 전국은 병자호란의 참화에 빠졌다.

무능한 정권이 낳은 전쟁, 정묘·병자호란의 피해는 예상보다 컸다.

한명기 교수는 정묘호란 당시 화약을 맺을 때부터 또 다른 전쟁의 불씨가 준비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가 처한 곤경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데 선수라고 평가한다.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정묘·병자호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요구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 박현모 연구실장이 본 전쟁원인 "親明 의리외교 고집 인조의 리더십 한계"

"첫 번째 위기(정묘호란)를 미봉한 것이 더 큰 위기(병자호란)를 맞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은 "위기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과정이 너무 안이했다"며 "(정묘호란의) 어정쩡한 봉합으로 (인조는) 리더십의 한계를 보였다"고 했다.


박 연구실장은 '공론정치 속에서의 인조의 우유부단함', '정보 유출' 등을 지적했다.

그는 "정묘·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공론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며 "인조가 광해군을 전면 부정하다보니, 국내 정치가 대외관계를 가로 막는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인조는 후금이 새롭게 부상하는 중원의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친명배금정책인 이른바 '의리외교'를 고집했다. 인조의 '의리외교'는 정묘·병자호란 발발 원인 중 하나다.

박 연구실장은 "인조는 무책임하고 우유부단했다"며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최종 판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서 신하에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이어 "'이괄의 난'(1624년·인조2년) 때에는 정통성 문제로 (외교정책에) 제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면서도 "정권이 안정된 시기에도 정통성에 끌려다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조선은 정묘호란이 끝난지 불과 약 10년만에 병자호란을 맞는다. 10년동안 인조정권은 무엇을 했을까.

박 연구실장은 "인조는 정묘화약 이후에도 중원 대륙의 정세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며 "명나라와의 의리만 고수했다"고 했다. 또 "삼정승과 육조의 판서들 역시 청(옛 후금)의 침입에 대해 어떠한 효과적인 대비도 하지않고 논의만 거듭하는 안이한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또한 "인조 정권은 실세들의 이권 챙기기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고 했다.

박 연구실장은 정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조선의 정보가 새나갔다"며 "청은 조선의 정황과 '위기 대응 시나리오'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정묘호란때와 같이 강화도로 향했다. 조선의 '시나리오'를 알고 있는 청나라 군대는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었고, 결국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했다.

박 연구실장은 "조선 조정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며 "도원수 김자점은 청의 이상 기후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했다"고 했다.

그는 "역사를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 훈민정음 창제 등처럼 중요한 '터닝포인트'(전환점)가 있다"며 "인조가 중립외교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정묘·병자호란은 없었을 것이다. 또 조선이 일본보다 앞서 근대화됐을 것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