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임승재기자]청나라 장수인 다이곤이 이끌고 온 배들이 강화도 갑곶진 앞 바다를 시커멓게 뒤덮었다. 강화도를 향해 발사된 청군의 홍이포(紅夷砲, 명나라 때 네덜란드의 대포를 모방해 만든 대포)가 굉음을 내며 시뻘건 불을 토해냈다. 갑곶을 지키던 조선 장수 강진흔은 7척의 배를 가지고 그야말로 외로운 사투를 벌였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진흔의 수군은 청군의 배를 여러 척 침몰시켰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수십 명의 군졸들이 청군의 화살과 대포에 맞아 죽었다. 강진흔도 화살을 여러 대 맞았다. 뒤늦게 도착한 구원병 장신의 수군을 향해 강진흔은 북을 치고 깃발을 휘저으며 지원 요청을 했다. 하지만 이미 겁에 질린 장신은 뱃머리를 돌려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1637년 1월 22일이었다. 그리고 8일 뒤 조선의 임금 인조는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남한산성이 포위되다
인조 14년(1636년) 음력 12월 6일 의주 용골산에서 봉화가 올랐다. 청나라 군대의 이상 징후가 포착된 것이다. 그러나 한양 외곽 방어선에 해당하는 정방산에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이 사실을 곧바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괜한 일로 서울 도성이 소란스러워질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김자점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정에 장계를 올린 것은 압록강을 건넌 청군의 기마병이 이미 평양 부근 순안(順安)을 지났을 때였다. 기마병을 필두로 한 12만명의 대군이었다. 홍타이지는 처음부터 조선의 주요 산성들을 공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조선 정벌에 앞서 인조에게 "귀국이 산성을 수없이 쌓았지만 만약 내가 큰 길을 따라 곧장 서울로 향한다면 그 산성으로 나를 막아낼 수 있겠냐"는 최후통첩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오히려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의 기존 주요 방어진을 없애고, 병력을 백마산성과 자모산성 등으로 옮긴다. 이 산성들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대로와 길게는 하루 이틀이 걸리는 먼 거리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청군에게 길을 터준 셈이었다. 청군의 기마병은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부터 차단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청나라는 10년 전 정묘호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조선군의 기강은 말이 아니었다. 나만갑의 '병자록' 12월 14일자 기록을 보면, 도감장관 이흥업이 기마병을 이끌고 성 밖의 적을 치러 나가는데, 하사받은 술과 작별의 의미로 동료들이 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나머지 모두가 취해 결국 적에게 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가까스로 도성을 빠져나온 인조는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히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은 16일 마부대가 이끄는 청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한다. 성 안의 장수들은 겁이 나 밖에 나아가 싸울 의지가 없었다. 청군은 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성 안에 있는 조선 병력은 1만8천명 안팎이었다. 청군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식량난이었다. 창고에 있는 쌀과 잡곡이 겨우 1만6천여석 밖에 되지 않았다. 1만명의 군사가 한 달을 겨우 버틸 적은 양이었다. 추위도 큰 걱정거리였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했고, 심지어 활 시위를 당기지 못할 만큼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다. 성 안에서는 땔감을 마련하려고 행랑과 옥사를 허무는 일도 있었다.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강원도와 전라도에서 몇 차례 병력이 올라왔으나, 청군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했다.
남한산성은 산세가 워낙 험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다보니 청군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한다. 언뜻 '트로이의 목마'를 연상케 하는 기구도 만들었다. 성을 넘기 위한 용도로 나무를 깎아 사람 모양을 한 길고 커다란 목인(木人)을 만들어 성 근처에 갖다 놨는데, 그 속은 텅비어 사람이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청군이 온종일 행궁을 향해 쏘아댄 홍이포는 남한산성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당시 '연려실기술' 1월 24일의 기록을 보면 홍이포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케 한다. 탄환의 크기가 모과 열매와 같은데, 그 위력이 기와집 세 채를 꿰뚫은 다음 땅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더 들어가 쳐박혔다는 것이다. 사정거리도 엄청났다. '병자록'에는 청군이 남쪽 성 밖에서 쏜 홍이포 탄환이 성을 지나 북쪽 성 밖의 '10리'(4㎞) 쯤 되는 청군의 진지에 떨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무기 전문가인 박재광 전쟁기념관 교육팀장은 "홍이포의 파괴력과 사정거리는 실로 위력적이었지만,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이 적에게 뚫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남한산성이 항복을 하게 된 것은 강화도 함락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 '보장지처' 강화도가 무너지다
인조가 머무르던 남한산성이 완전히 고립돼 있을 때 강화도의 방어 책임을 지고 있던 김경징은 "적이 날아서도 건너지 못할 것이다"며 아침 저녁으로 잔치를 열고 술을 마셔댔다. 오로지 김포 등 강화도 인근의 마을에서 자신이 쓸 곡식을 가져오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런 김경징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는 당시 최고의 권력자로 꼽히는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 김류의 아들이었다.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나중의 효종) 조차도 그의 권세에 눌려 감히 입을 열지 못했을 정도란다.
1637년 1월21일, 김경징에게 달갑지 않은 소식이 들어왔다. "적군이 수레에 작은 배를 실어 강화도로 향하고 있습니다." 김포 통진의 수령직을 맡고 있던 김적의 보고였다. 하지만 김경징은 "강물이 얼었는데, 어떻게 배를 젓는다는 말이냐"며 허위 보고를 해 군정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김적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김적의 보고는 틀린 게 아니었다. 그 이틀 전에 청군은 강을 건너기 위해 자신들이 만든 배를 수레에 싣고 강화도로 진군을 시작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오래 전부터 남한산성에서 버티고 있는 인조를 굴복시키려면 조선의 마지막 보루인 강화도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홍타이지는 한강과 임진강 일대에 있는 헌 선박을 모아다가 고치고, 민가를 헐어 뗏목과 배를 제작하도록 지시했다.
김경징은 갑곶 방어진지에서도 같은 보고가 올라오자 뒤늦게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당황한 김경징은 갑곶과 월곶 등에 군사를 나눠 지휘관들에게 해안 방어에 나서도록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문관 출신이 대부분인 지휘관들은 전투 경험이 없었고, 군사들은 그동안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청군은 강폭이 좁은 갑곶을 통해 강화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 1월 22일 기록을 보면, 청나라 장수인 다이곤이 군사 3만명을 태운 배를 이끌고 갑곶진으로 진격하면서 홍이포를 쏘자 아군이 겁에 질려 접근조차 못했다. 당시 강화도 해안 방어의 주력 부대는 광성진에 머무르고 있던 장신의 수군이었다. 갑곶에 있던 조선의 수군 전력은 강진흔이 이끄는 7척의 배가 전부였다. 장신의 수군은 광성진에서 갑곶진으로 오는 길에 수심이 가장 낮아지는 조금 때를 만나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뒤늦게 도착한 장신은 지레 겁을 먹고 강진흔의 거듭된 지원 요청을 무시한 채 곧장 퇴각해 버렸다. 김경징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해안방어를 포기한 채 강화산성으로 후퇴했다. 갑곶 방어선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청군은 강화산성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이때 김경징과 장신은 성에 있는 노모마저 그대로 남겨두고 도망을 쳤다. 황선신이 진해루에서 결사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문신인 이시직은 자결하기에 앞서 아들에게 글을 남긴다. '장강(長江)'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하면서까지 살 구멍만 찾는구나. 수비가 무너져 모든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저 남한산성도 곧 함락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 바에야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한다….'
인조가 강화도의 함락 소식을 보고받은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월 26일이었다. 인조는 30일 결국 남한산성을 나와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정묘·병자호란의 전투들
정묘… 의병들 분전 용골산성서 후금과 대치
병자… 결전피한 속도전 힘한번 못쓰고 당해
[경인일보=목동훈기자]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순식간에 패한 전쟁이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은 후금의 남하를 지연시키려고 서북지역에 산성 중심의 방어 체계를 구축, 후금군과 여러 전투를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금군은 조선을 침략한 지 약 보름 만에 사실상 수도를 점령한다.
병자호란 때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조선군은 서북지역에서 전투다운 전투도 해 보지 못한 채 청나라의 남한산성·강화도 공격을 허용하게 된다.
정묘호란 주요 전투는 의주성 전투, 창성진 전투, 용골산성 전투, 능한산성 전투, 안주성 전투, 평양성 전투 등이 있다.
조선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했다.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완, 김시약, 기협 등의 장수들은 맞써 싸우다 숨지거나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묘호란 중 용골산성 전투는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로 꼽힌다. 이희건이 유격전에서 최후를 맞이하자 의병대장 정봉수가 방어태세를 강화한다. 의병들은 수차례에 걸친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낸다. 후금과 조선과의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도 의병들은 후금군에 항복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이 후금군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봉수에게 해산을 명령하기까지 이른다. 용골산성 전투는 정봉수가 남은 인원을 이끌고 철산 앞바다 대계도로 가면서 종료된다. 의병들은 후금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줬으며, 후금군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특히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울 태세를 갖췄다.
이홍두 홍익대 겸임교수는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준비 없이 당한 것이 양대호란이다"며 "정묘호란 당시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의병들이 후금군에 맞서 싸웠다. 전쟁이 나면 항상 서민이 적과 싸우고 가장 큰 피해를 본다"고 했다.
후금군이 수도에 도착했을 당시 인조는 한성에 없었다. 여몽전쟁 때 고려가 수도를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갔던 것,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파천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수도는 무방비 상태였다.
병자호란 때 청군은 산성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남한산성과 강화성 전투 외에 백마산성 전투, 철옹산성 전투도 있었지만 청군은 큰 결전을 피하고 한성으로 직행한다.
청군은 인조가 강화도로 갈 것을 알고 있었고, 조선의 '산성 중심 방어체계'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있을 때,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 배후를 교란시키기 위해 각 시·도에서 근왕병들이 조직됐다.
하지만 근왕병은 소집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소집해도 훈련이 돼 있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또 일부는 청군의 동태를 살피며 자신들의 안전만을 생각했다. 이런 점들에서 국방 체계 관료들의 기강이 문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라도 근왕병이 수원 광교산에서 홍타이지 매부 양고리를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지만 시·도 근왕병들은 강화가 성립되기 전까지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