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납산 약수터 앞 가평천에서 한 부부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입질이 좋은지 연방 낚싯대를 던지며 낚시 재미에 푹 빠진 듯하다. 물이 좋은지 풍경에 반한 것인지 물길따라 강태공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다.

[경인일보=글·사진┃가평/김민수기자]가평은 전체면적의 80%이상을 산지가 차지하고 있고 하천 및 계곡의 길이가 200㎞가 넘어 예로부터 하천을 중심으로 촌과 마을이 형성됐다. 이번에 찾은 올레길 2-2코스는 가평읍에서 북면으로 형성된 마을을 따라 가평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로, 가평천은 가평군의 최북단인 북면의 도마치와 화악산, 도성령이 수원지가 된다. 가평읍 가평교~자라목~개곡리~이곡리~목동초등학교~북면 목동으로 이어지는 이 코스는 10㎞ 구간에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렇다할 오르막 내리막이 없어 가벼운 옷차림으로 누구나 부담없이 발디뎌 볼 만하다.

# 마을 유래따라 걷는 재미도 쏠쏠

가평교를 건너기 전 보납산과 가평천을 바라보니 5월의 푸르름이 눈의 피로를 씻어주는 듯 시야가 시원하다. 가평의 안산이라는 보납산이 위용을 드러내고 이 산의 또다른 이름인 '석봉(石峯)'이 주는 묵묵함이 전해져온다. 보납산은 경기 최고봉이며 경기 오악의 으뜸인 화악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871년 기록된 가평군읍지에 따르면 가평읍의 주산은 수정봉이며 안산은 보납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고개를 돌려바라보니 기념비 하나가 눈에 띈다. 제1군단 군단장이었던 '전부일 장군의 송덕비'다. 가평천 제방공사에 도움을 준 전 장군과 장병들에 대한 주민들의 고마움의 표시라고 한다.

가평교를 건너는 것으로 탐방이 시작됐다. 보납산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더니 가평천 위의 가평교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한숨 깊게 마셔 달라는 듯 상쾌하게 얼굴을 때린다. 콧속이 시원하다. 출발 전부터 호사다.

▲ 읍내8리 자라목마을 표지석.

읍내8리 자라목(鼈項) 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자라목 마을의 지명은 늪산과 보납산을 향교쪽에서 바라보면 자라가 강속에서 떠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설, 예전 도로와 철도가 지나가는 곳이 자라의 목처럼 낮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고개를 자라목고개라고 불렀다는 설, 일제강점기때 도로 건설과 경춘선 철도 건설공사시 일본사람들이 가평읍의 정기를 자르려 이곳을 절단했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가평천을 따라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납산 약수터가 반긴다. 약수터 앞쪽에는 노부부가 연방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그 뒷모습에서 황혼의 여유로움이 물씬 느껴진다. 이내 논 밭이 보이더니 또다른 마을인 엽광촌(葉廣村)이다. 이 마을은 한지 생산의 원료인 닥나무와 양잠을 하는 뽕나무, 밤나무 등의 활엽수가 많다. 잎이 넓은 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 변해 잎내비로도 불린다.

잎내비마을을 뒤로 한 채 모퉁이를 돌아서니 산속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에 나뭇잎이 서로에게 이야기하듯 아우성이다. 그 옆에서 유유히 흐르던 냇물도 거센 물결로 시선을 머물게 한다. 은은한 솔내음이 번지며 잠자고 있던 온몸의 감각기관을 들쑤신다.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듯하다.

이번 올레길 코스는 여러개의 다리가 놓여 있어 곳곳에서 가평천의 풍광을 조망하는 것도 큰 볼거리다. 구간중 두번째 다리를 건너니 너른 논이 펼쳐진다. 마장리에 다다른 것이다. 마장리는 상마장과 하마장으로 구분되며 상마장은 각담말, 당목개, 창랑포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 보납산 약수터.

상마장리 일대는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된 야철주거지(冶鐵住居址) 유적지가 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원개시 초기의 유적지로 보고되고 있으며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유적지란다. 아마도 선사시대부터 생활의 터전을 이곳 마장리에 잡아 농경문화가 발달했을 것이다.

이어 상마장의 또다른 마을인 당목개가 일행을 맞이한다. 당목개 마을은 논밭이 비옥하고 넓고 마을 옆을 흐르고 있는 가평천의 물빛이 유난히 푸르고 포말이 일어 창랑포(滄浪浦)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당목개 입구에는 군사창을 지어 이 지역에서 세금으로 받아들인 곡물을 보관했으며, 창고 뒤편에 당(堂)을 세우고 매년 봄이 오면 오곡 풍년 등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당목개는 이러한 당을 지나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지명이 생겨났다.

당목개와 개곡리를 이어주는 세번째 다리를 건너니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완연하다. 여기저기서 모내기 준비를 위해 트랙터의 바퀴는 쉴새없이 논바닥을 휘젓고 있다. 냇가에는 햇빛으로 인해 온통 은빛 세상이다. 그 곁에서 낚시를 하는 강태공은 낚싯대를 치켜들며 영화속의 주인공인 것처럼 한껏 폼을 잡는다.

▲ 가평 올레길2-2코스에 들어서니 코스 이정표를 지나 길다랗게 줄지어선 가로수가 탐방객을 반긴다.

개곡리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져 주막이 생기고 저자거리가 형성돼 면소재지가 아님에도 가평에서는 유일하게 5일장이 섰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예전에는 가평에서 강원도 춘천지방을 가기 위해서는 개곡리 가일마을에 있는 줄길이 고개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그만큼 유동인구가 많았으리라.

논과 밭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네번째 다리 가북교가 보인다.

이제부터는 북면 이곡리(梨谷里)다. 이곳은 가평읍 마장리에 소재한 속칭 노루목고개 너머 있는 마을로 북면의 관문마을이다. 북면의 모든 하천이 모여 이곳을 지나며 배일과 가골, 두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돼 있다. 배일(바일)은 안말(內村)과 등무터(登武垈)로 갈리고, 가골은 석장리(石長里)로 변했으나 1865년 관제개편에 의해 배일의 배는 이(梨)자로, 가골의 골은 곡(谷)자로 써서 이곡리(梨谷里)가 됐다.


이곡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펼쳤던 캐나다군의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전투기념비가 건립돼 있다. 이 기념비를 지나자 벚나무와 단풍나무가 길가에 빼곡히 들어서 있다.

계절마다 형형색색으로 물들 나뭇잎들이 눈에 선하다. 마을 또한 한적하고 고요한 마을에 이방객들의 소리에 놀란 누렁이가 텃새를 부린다. 누렁이 소리가 잦아들쯤 되니 마지막다리인 목동교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가평지역의 거사를 준비해 왜헌(倭憲)과 맞서 싸우던 전통과 애국심의 고장 목동리다. 자라목마을을 출발해 가평천을 거슬러오른지 어느덧 3시간이 지나 목동리에 도착하니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5월의 햇살이 제법 따갑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