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여주/박승용·이윤희기자]여강길은 여주에 흐르는 남한강을 '여강'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데서 따온 이름으로, 여강을 따라 걷는 길을 일컫는다.
지난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전국에 7개의 문화생태탐방로를 선정했고, 그중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여주의 여강길이 선정됐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고 전국 어느 길과 비교해도 걷기 코스로 손색이 없다는 의미일 게다. 그러나 선정 당시와 달리 지금은 4대강 공사로 탐방로 일부 구간이 없어지기도 했고, 보공사 현장이 있어 마을로 우회하거나 일반국도로 걸어야하는 구간이 생겨나 아쉬움을 더한다. 그럼에도 여강길은 주변 풍광과 이런저런 사연이 걷기의 느린 움직임 속에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일종의 '마력'을 가지고 있어 매력적이다.
# 길따라 구석구석 마을여행
여강길은 3개 코스로 나뉜다. 그중 1코스 '옛나루터길'은 코스중 가장 짧지만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탐방객들이 가장 많다. 코스거리는 15.4㎞로, 성인이 걷는데 통상 5~6시간 걸린다.
이 코스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상류와 하류를,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었던 옛나루터와 청동기시대 벼의 화석이 발견된 흔암리선사주거지, 과거시험을 보러 많이 다녔다는 아홉사리길, 마을의 입구가 하나라서 도로 나와야 한다는 도리 등이 대표적 볼거리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강변 모래가 너무 고와서 햇볕을 받으면 금빛은빛으로 빛난다는 은모래금모래길 구간이 현재 4대강 공사로 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여주터미널에서 출발해 '달을 맞는 누각'이라는 영월루(迎月樓)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했다. 영월루(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7호)는 조선시대 여주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1925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명칭도 기좌제일루(畿左第一樓)에서 영월루로 변경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남한강과 여주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발걸음을 옮기니 강변유원지인 은모래금모래길이 나타났지만 앞서 얘기했듯 4대강 공사로 이곳에서 부라우나루터 구간이 막혀 있다. 강변길을 대신해 (연양리)마을을 잇는 우회로로 걸어 나왔다.
수운이 발달했던 시대의 정류장인 나루터(이호, 부라우, 우만리나루터)를 만났다. 이호나루터를 지나 강과 바위가 어우러진 부라우나루터를 찾았다. 어린시절 이곳에서 놀던 추억을 되새기려 이곳을 찾았다는 한 중년의 부부는 절경에 감탄하면서도 예전과 다르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수심이 예전에 비해 높아져 주놀이터였던 바위가 물에 잠겼고, 맞은편 강변의 푸릇한 추억은 이제 제방이 쌓여 누렇게 변했다.
부라우나루터는 여주읍 단현리와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 지역을 연결하던 나루로, 나루 주변의 바위들이 붉은 색을 띠어 '부라우'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고갯마루에는 당시 세도가인 민참판댁 외가가 있었다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능현리는 여흥 민씨의 집성촌이었다.
나루터는 1975년 폐쇄됐지만, 나루를 지키는 느티나무는 여전히 울창하다. 이곳의 수심이 예전보다 높아진 만큼 풍경 감상도 좋지만 안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우만리나루터가 보인다. 300년가량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과거 나루는 바위나 큰 나무를 중심으로 삼아 배를 운행했는데 느티나무가 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제는 탐방객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역할을 대신한다. 우만리나루터는 1972년 홍수로 없어지기 전까지 음력 정월 보름이면 우물 3곳에서 남한강물을 떠다가 지은 밥을 날이 밝기 전에 강으로 흘려보냈다. 용왕신을 배불리 먹여 사고를 막고자 하는 액땜이었다고 한다.
마을을 돌아나와 흔암리로 향했다. 마을 앞에 크고 흰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를 인근 여주읍 멱곡리 김참판댁에서 상석으로 쓰기 위해 채석해 큰 비를 세웠다는 이야기에서 흰바위, 흔바위, 흔암리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흔암리에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선사유적지가 있다. 이 시대는 석기시대와는 다르게 농경이 시작됐다. 낮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밭농사가 이뤄져 사냥이나 채집에 의해 식량을 의존하지 않고 경작과 불을 이용한 방식이 도입돼 농업시대를 열게 된다. 흔암리 유적지는 화덕자리와 토기 안에 탄화된 쌀을 비롯해 조, 수수, 보리, 콩 등이 출토됐는데 여러 잡곡이 재배됐음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짚풀로 만든 가옥, 일종의 움막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긴 하지만 들어가보니 아늑한 느낌마저 든다. 유적지가 농촌마을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보니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주의하시길.
마을내 이정표를 따라 아홉사리 과거길에 들어섰다. 혹자는 국수사리를 아홉개 말아놓은 것 같다고 해 '아홉사리'로 불렀다고 하고 또다른 설은 흔암리와 도리를 연결하는 오솔길로 좁고 험해 아홉 구비를 굽이굽이 돌아간다고 해 아홉사리라는 얘기도 있다. 음력 9월9일 아홉번째 봉우리에서 구절초를 캐다 먹으면 만병이 낫는다는 속설도 있다.
이 길을 따라 옛날에는 경상도, 충청도에서 과거(科擧)를 보러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고개를 넘으면 도리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도리는 점동면 장안리 마을 서편에 도호동(桃湖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수운이 발달하면서 강변쪽이 생활이 편리하고 토양이 비옥하므로 도호동 사람들이 이동해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해서 도래(桃來)가 되고 되래로 발음했으며 도리라는 행정지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엔 도리마을을 향해 난 도로가 단 하나 뿐이어서 들어온 길을 되돌아 나가야 했으므로 '되래' 혹은 '도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도 한다.
이런저런 마을의 얘기를 전해 들으며 길을 걷는데 문득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길을 소개해주는 여강길 박희진 사무국장에게 온 전화다. 내용인즉 "황포돛배는 탈 수 없느냐"하는 것이다. 황포돛배는 누런 포를 돛에 달고 바람의 힘으로 물자를 수송하던 배를 말한다. 한양과 중부권을 이어주던 수상교통 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해 몇년전까지 운행했다고 한다. 의외로 황포돛배 체험에 대한 문의가 많다고하는데 현재는 4대강 공사로 탈 수는 없다고 하니 참고해야 할 듯하다.

여강을 따라 걷는 여강길, 나루와 나루를 건너고 마을과 마을을 지나다보니 1코스가 끝이 났다. 함께 한 박 사무국장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코스의 각 거점이 구슬이라면 이것을 꿰는 것은 길이다. 여강길의 특징은 접근성이다. 큰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곳"이라며 언제든 찾아오라고 권한다.
※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