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베를린.모스크바=연합뉴스)독일에서 시작된 유럽의 유해 대장균 공포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진원지인 독일에선 신규 감염자 발생은 일단 줄어드는 추세지만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다. 또 감염자 발생 국가 수도 늘어나는 상황에서 네덜란드에선 독일 것과는 다른 종류의 유해 대장균이 채소에서 발견돼 우려를 더하고 있다.

   독일 등 각국 보건당국은 연일 새로운 관련 정보들을 쏟아내면서도 최초 감염자 확인 후 6주, 최초 사망자 발생 후 2주 넘게 지나도록 정작 명확한 오염 경로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 채소나 과일 등의 소비를 주저하고, 팔리지 않은 채소들을 폐기처분하거나 밭과 창고에 쌓아둔 농가와 유통업자들의 한숨 소리는 날로 커지고 있다.

   유럽 국가들 내부에선 사태의 확산 책임과 보상 규모를 놓고 분란이 일고 있다. 러시아와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유럽산 채소 수입 금지 조치를 둘러싼 외교적 분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 사망자 30명으로 증가 =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당국은 9일 이번 장출혈성 대장균(EHEC) 질환의 진원지인 함부르크를 지난달 부인과 함께 다녀온 57세의 남성이 이날 숨졌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EHEC로 인한 전체 사망자 수는 독일을 방문했던 스웨덴 여성 1명을 포함해 모두 30명으로 늘어났다. 사망자는 스웨덴 여성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독일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감염자 약 2천900명의 대부분도 독일인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9일 현재까지 독일 이외에서 확인된 이번 변종 EHEC 감염자는 미국 3명을 포함해 12개 국가 97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독일을 여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질병관리본부에 해당하는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RKI)는 이번 주 중반부터 신규 감염자 발생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밝혔으며, 다이엘 바르 독일 보건장관은 이를 근거로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고 지난 8일 주장했다.

   그러나 RKI는 9일 이와 관련해 "질병 발생이 자연히 사라지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채소나 과일 섭취를 줄이고 위생에 더 신경을 쓰기 때문인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감염자 가운데 722명이 신장 기능 이상 등 심각한 증상으로 고통받고 있는데다 발생 지역이 다양화되고 있어 보건당국자들이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 네덜란드 채소에서도 유해 대장균 검출 = 네덜란드 보건당국은 9일 자국산 채소 붉은 근대(레드 비트)가 유해 대장균에 오염됐음이 확인돼 긴급 회수조치를 취했다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식품안전청은 자국 농산물 재배업체인 하무가 국내에 판매하고 독일과 벨기에 등에 수출한 붉은 근대에서 유해 대장균이 검출됐으나 다른 업체 채소의 경우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식품안전청은 이 대장균의 종류를 규명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 중이며, 이로 인해 심각한 질병이 일어난 사례는 아직 보고받은 바 없다고 강조했다.

   에스더 필론 식품안전청 대변인은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이 대장균은 독일에서 문제가 된 EHEC와는 다른 종류여서 이 대장균에 감염될 경우 질병을 앓을 수는 있으나 인체에 치명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독일 카셀 시 보건당국은 9일 EHEC 감염 증세로 확인된 시민 가운데 8명이 지난달 28일 괴팅겐 시의 한 마을에서 열린 칠순잔치에 참석했던 것으로 드러나 단체급식 업체 등을 상대로 역학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한편, 이날 슬로바키아에서는 25세의 남성이 유해 대장균 감염 증세로 입원했으나 병원 측은 대장균의 종류가 독일 것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 오염경로와 병원균 종류 정확한 규명 안돼 = 사태의 진원지인 독일의 함부르크 시 당국은 오염원으로 당초 스페인산 유기농 오이를 지목했다. 그러나 정밀 검사 결과 스페인산 오이에서 나온 대장균은 감염 환자들에게서 검출된 균과 종류가 다른 것으로 판명났다.

   이어 독일 각 주의 보건당국은 토마토와 양상추, 샐러드용 채소, 새싹 채소 등을 차례로 유력한 오염원으로 꼽았으나 아직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정 시기에 생산된 채소만 대장균에 오염됐을 경우 의심이 가는 업체에 현재 남아 있는 제품을 수거, 검사하더라도 균이 검출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오염원 규명작업은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문제의 대장균 종류에 대한 전문가 견해도 일부 엇갈리고 있다. 환자 대부분은 설사와 탈수 증상을 겪고 있으며, 신장기능 이상으로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도 공통적인 증상이다. 이 때문에 역학자들은 이번 사태의 원인균을 장출혈성 대장균(EHEC)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독일 연방 위험평가연구소의 로타르 보이틴 박사는 이 보다는 장응집성 대장균(EAEC) 쪽에 속한다면서 보통 반추동물이 아닌 사람의 소화기관에서 발견되는 EAEC의 변종인 이 박테리아는 인체의 내장에 달라붙어 시가(shiga) 독소를 내뿜기 때문에 특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오염원 등에 대한 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채 연일 새로운 감염자와 사망자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 시민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일부 지역이나 국가 생산 또는 특정 채소와 과일을 기피하고 있다. 아예 당분간 채소나 토마토는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 농가.유통업체 피해 확산 = 채소 등의 소비가 격감해 유럽 각국 농민들이 지난 주까지 입은 손해는 모두 4억1천700만유로(약 6천500억원)에 이른다고 농민단체들은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다 크고 작은 중간 유통업자들이 입은 피해까지 합치면 손해액은 눈덩이 처럼 불어난다.

   더욱이 사태가 가라앉지 않고 수출길마저 막혀 피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미 유럽산 채소와 과일의 최대 수입국인 러시아는 전면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고, 사우디 아라비아 등도 금수조치에 동참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8일 긴급 각료회의를 열어 각국 농민 보상금으로 2억1천만유로를 내놓겠다고 밝혔으나 농민들은 턱없이 적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사태 초기 독일 함부르크 시 당국의 잘못된 발표로 자국산 오이가 주범으로 오인된 스페인의 경우 이미 입은 피해만 2억유로라며 관계장관들까지 나서 연일 독일과 EU 측에 추가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또 마렛 사비츠키 폴란드 농무장관은 "독일 당국의 부적절한 감독 및 위기대응체계와 발언 등으로 인해 폴란드 농산물의 신뢰가 떨어진 탓에 농민들이 이미 1억4천500만즐로티(약 580억원)의 손해를 입은 데 이어 하루 1천만즐로티(약 40억원) 씩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내에서도 당국의 허술한 조치에 대한 비난과 함께 주정부 별로 지나치게 분산된 식품ㆍ보건 감독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베르너 호이에르 독일 외무차관은 9일 베를린에서 디에고 로페스 가리도 스페인 농무장관과 회담한 후 기자회견을 통해 "스페인 농산물의 이미지와 명예를 회복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다짐해야 했다. 또 앙겔라 메켈 총리도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오염원 규명은 매우 복잡한 작업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국내외의 비판을 누그러뜨리려 안간힘을 썼다.

   한편, EU와 러시아는 9일 러시아의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이틀 일정의 정례 정상회담을 열었으나 러시아의 EU 채소 수입 금지 조치를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회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러시아와 EU 측 언론매체들은 보도했다.

   EU 측은 앞서 러시아의 수입 금지 조치에 대해 "부적절한 것"라며 철회를 촉구했으며, 일부 언론매체는 외교소식통들을 인용, 러시아 측이 숙원사항인 비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지렛대로 금수조치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측의 한 외교관은 EU 측의 그런 대응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국민 보건과 안전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며 이에 따른 금수는 세계무역기구(WTO)도 용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다른 러시아 외교관은 브뤼셀에 있는 EU 관리들 모두가 예외 없이 이 시점에도 아무런 검사를 안한 채 유럽산 오이 등을 과감하게 먹는 시범을 보인다면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비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