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정진오기자]19세기는 바야흐로 서세동점의 시기였다. 서구열강은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활로를 찾아 아시아로 무대를 옮겼다. 동아시아도 예외일 수 없었다. 서구인들에게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극동 3국' 중 마지막 남은 나라였다. 조선이 서구세력과 맞부딪친 그 중심에 인천이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의 핵심 전투가 인천 강화도에서 벌어졌다. 강화도가 바로 양요(洋擾)의 최전선이었던 것이다. 230여년 만의 전쟁은 또 인천에서 터졌다. 프랑스와 미국과의 짧았던 두 차례의 전쟁은 겉으로는 조선군의 승리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은 열강과의 전력 비교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서구를 향해 '척화(斥和)'만을 외쳤고, 열강은 조선을 먼저 차지하려 서로 애썼다. ┃관련기사 9면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란 의미의 '이양인'(異樣人)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던 조선은 양요를 거친 뒤 1876년부터 1886년까지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열강과 순차적으로 '개국 조약'을 맺는다.

자의든 타의든 조선이 서구와의 관계 속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 두 전쟁에 대해 앞으로 5회에 걸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