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신미양요는 조선이 각각 프랑스군·미군과 벌인 전쟁이다.

세계 학자들과 외국의 사료는 양대 양요가 발발하기 전부터 나타난 조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지도부, 부패가 만연했던 사회, 피할 수 없는 열강과의 만남에서 조선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이다.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조선

19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급속도로 변화한다.

청나라는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해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1860년에는 영·프 연합군에 베이징을 점령 당한다. 일본은 1854년 개항을 한다. 아시아 전반에 퍼진 변화의 물결은 한반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필연적 충돌이었다.

영국한국학회 회원이기도 한 제임스 호어(James Hoare) 런던대학교 교수는 지난 11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경인일보와의 전화,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당시 정세를 조선의 의지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병인·신미양요도 동아시아에서 불어닥친 변화의 흐름 속에 일부였다. 피할 수 없었다"고 했다.

호어 교수는 "조선은 이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전쟁을 키워 나갔다"며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조선에 결국 파국적 결말이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조선이 선교사를 박해한 행위가 병인양요의 빌미가 됐다. 프랑스는 1860년 중국에서도 선교사를 학살하자 여름궁(圓明園)을 태우는 것으로 보복한 일이 있었다"며 "당시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을 두고 선교사를 죽인 야만적인 국가이므로 대화나 타협이 아닌 무력을 써도 된다는 논리를 갖추게 했다"고 말했다.

조선이 파국적 결말을 맞은 원인을 흥선대원군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일본 고베(神戶)대학교 기무라 칸(木村 幹) 교수 역시 전화, 이메일 인터뷰에서 "흥선대원군은 체제강화, 중앙집권화를 이루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며 "대원군은 외부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면 자신의 위치가 낮아지게 될 거라는 염려를 해서 별다른 방비책도 없이 외부를 자극하는 행동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기무라 교수는 흥선대원군이 일본에서 화포를 몰래 들여온 사실을 볼때 대원군도 자신의 쇄국정책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원군은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문호 개방과 외부와의 교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며 "대원군이 부산을 통해 일본에서 서양의 화포를 수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대원군이 음성적으로 외부와 교류하는 모습을 통해 결국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아닌 자신의 정치욕 때문에 쇄국정책을 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실제로 미국의 기록에 '병인양요 뒤 신미양요때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한 서양화포를 사용해 미국이 겁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겉과 속이 다른 대원군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학계에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평가를 두고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의 전투 장면이나 강화도 일대의 풍광 그리고 피해 참상 등은 그림으로, 또 사진으로 기록됐다. 병인양요는 참전했던 프랑스 군인 쥐베르에 의해서 그려졌다. 이 그림들은 전쟁 이듬해 프랑스 현지 언론에 공개됐다. 신미양요의 장면들은 종군 기자들이 주로 촬영했다.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읍내를 포격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사진 위 왼쪽)과 프랑스 함대가 강화해안에 접근하자 방어진지에서 포격을 가하는 모습(사진 위 오른쪽)이다. 덕진진(모노카시 요새)을 점거한 미 해병대가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는 장면(사진 아래 왼쪽)과 미 함정에 사로잡힌 조선 포로들과 포로귀환 교섭차 나온 조선인 관리들이 대화하는 모습(사진 아래 오른쪽)이 선명하다. 이들 그림과 사진은 '서양인이 만든 근대 전기 한국 이미지 Ⅲ-침탈 그리고 전쟁'(청년사)에 실린 것을 다시 촬영한 것이다. /김범준기자

■"부패한 조선은 허약하다"

청이 무너졌다. 아편전쟁에 패배하면서 청은 더 이상 대국으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서구 열강은 조선에서 청이 차지하던 패권을 잡으려는 시도를 계속하게 된다.

열강은 조선 내부의 문제점을 빠르게 파악했다. 허술한 조선 내부를 알게 된 서구 열강은 조선을 쉬운 상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바라본 조선은 쉽게 점령할 수 있는 나라였다.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과 6월 폭동을 거쳐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군사쿠데타로 황제에 등극한다. 나폴레옹은 등극과 동시에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한다. 천주교 신자 박해가 있었던 조선은 프랑스에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는 게렝(Guerin) 제독에게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건과 기회를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이후 게렝 제독은 '프랑스가 조선을 점령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는 보고를 파리 식민성 장관에게 하게 된다.

게렝 제독은 '조선의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해 정부와 백성 사이가 분열되어 있다. 조선은 무력한 나라다. 관리들은 군함 한 척만 나타나도 달아날 줄 밖에 모른다'고 보고했다. 또 '조선은 언젠가는 유럽 열강의 야심에 희생이 될 수밖에 없는 나라다. 중국도 조선을 보호해 줄 만한 힘이 없다'는 내용을 보고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을 기록한 다른 외국인들의 저술에도 조선 내부의 문제가 그려져 있다.

프랑스인 달레(Pere Claude Charles Dallet) 신부는 1874년에 출판된 '한국의 교회 역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라는 책에서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이 위로는 국왕을 피폐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선에서는 관직이 공공연하게 매매되고 암행어사까지 권력을 이용해 돈을 모은다"고 했다.

그의 책에는 '세금징수의 기준이 되는 호구조사대장도 도무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지방의 병기고에는 도무지 쓸 만한 피복, 탄약, 병기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군청관리들이 팔아먹었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 지배계급을 비판하는 저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원군 부(父) 남연군묘 도굴범으로 알려진 오페르트는 1880년 출판된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이라는 책에서 "모든 관직들이 가장 높은 값을 제공한 사람에게 주어지고 관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아래 사람들을 상대로 강도와 수탈, 약탈과 착취를 저지른다"고 당시 피폐한 조선 지도부의 모습을 그렸다.

※ 日 기무라 교수가 본 '19세기 조선'… "국제정세 정보량 차이가 한·일 운명 갈라"

조선조정 중국측 일방적 정보만 신뢰… 잘못된 정세판단 문명개화 시기 늦어

"중국의 아편전쟁을 바라본 상반된 시각과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량의 차이가 일본과 조선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일본 고베(神戶)대학교 기무라 칸(木村 幹) 교수는 경인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19세기말 조선이 파국에 접어든 것은 중국을 바라본 잘못된 시각과 국제 정세에 대한 부족한 정보를 근본적 원인으로 볼 수 있다"며 이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기무라 교수는 "당시 일본은 중국을 '라이벌'로 봤고, 중국의 아편전쟁 패배를 두고 '빨리 개국해 문명개화하지 않으면 중국과 같은 상황에 처할 것이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조선은 서구 열강과의 계속되는 접촉이 있어도 이를 극복하겠다는 인식을 가지지 않고 중국이 건재하니 서구 열강을 상대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고 했다.

그는 상반된 시각의 원인 중 하나로 '조선의 일방향적 정보 교류'를 꼽았다.

기무라 교수는 "일본의 에도막부는 일찍이 나가사키항을 개항하면서 그 곳을 통해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며 "일본은 중국 광저우 등의 지역에서 직접 무역을 하면서 얻은 정보로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흐름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기무라 교수는 "하지만 조선의 지도부는 중국을 통한 일방향적 정보만 신뢰했다"며 "이에 따라 중국이 건재하고 조선이 위기시에 중국이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또 "조선은 병인·신미양요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했다"며 "병인·신미양요 승리로 조선은 일종의 자만심을 가지게 됐고, 이는 조선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기무라 교수는 "조선의 이런 인식이 훗날 결국 중국이 힘을 잃게 됐을때 '대국 중국이 패배했다. 그런데 어찌 조선이 대항하겠는가'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지도부의 자포자기로 연결됐다"고 했다. 또 "결국 19세기말 국제정세에 대한 두 나라의 각기 다른 판단으로, 조선은 일본에 비해 문명개화가 30년 정도 늦어지게 됐다"며 "이것이 훗날 '한일합병'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

기무라 칸 교수는 일본에서 근현대 국제관계 전문가다. 현재는 고베대학교 대학원 국제협력연구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 '한국정치 민주화', '고종·민비' 등이 있다.

/홍현기기자

※ 북한 자료에 기록된 '신미양요'

'反美' 강조 반침략·반제투쟁 부각… 전투상황등 객관적 사실 왜곡 과장

'반미'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북한에서는 미국의 첫 한반도 침공인 '신미양요'를 어떻게 볼까.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 제13호(2003년 가을호)는 '북한 역사학이 본 우리 역사 속 전쟁'을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신미양요를 보는 북한 역사학계의 시각을 1940년대, 1950~60년대, 1970~80년대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한 교수는 신미양요의 과정과 그 성격 및 의의에 관한 북한의 역사인식은 남한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를 남한은 해방 이후 미국과 가장 밀접한 우방관계를 맺어온 반면 북한은 미국과 가장 적대적인 대립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정치상황에서 찾고 있다.

이 특집호에 따르면, 해방직후 나온 '조선력사'에서는 신미양요와 관련한 언급은 전혀 없다. 1949년 발간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 가서야 신미양요가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주의적 침략 의도와 이에 대한 어재연 부대의 장렬한 항전만 약술하는 식이었다.

북한의 신미양요에 대한 평가는 이른바 '주체성'이 강조되던 1950년대 후반부터 도드라진다. '미국 식민지 약탈자들의 조선 침입' 등으로 규정하면서 '광성보 전투에서 적함 3척을 격파하고 중대장 맥키 대위 이하 수십 명을 처단했다'는 식으로 내용을 왜곡하기까지 했다.

이후의 서술도 손돌목·초지진·광성보 전투 상황을 왜곡한 채 인민의 투쟁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는 논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 교수는 "북한의 역사학계는 주체사관의 확립을 전후해서 현재까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춰 반침략·반제투쟁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면서 "그러나 제너럴셔먼 호 사건 이후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관련된 주제는 인민들의 반미투쟁을 강조하는 데 치우친 나머지 객관적인 사실마저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정진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