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은 '최초의 세계전쟁' 또는 '0차 세계대전'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러시아, 전쟁터가 된 조선과 청나라, 그리고 '전쟁 지원그룹'인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러일전쟁은 전쟁에 얽혀 있는 나라가 8개국이나 된다. 말 그대로 세계대전이었다.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터진 러일전쟁은 그만큼 원인도 다양했고, 그 결과도 엄청났다. 러일전쟁이 끝난 지 10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 그 전쟁이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한반도에서 시작됐고, 한반도가 목표였다는 점에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1894년의 청일전쟁은 1904년 러일전쟁의 '연습 게임'에 지나지 않았다. '본 게임'인 러일전쟁을 위해 일본은 10년을 준비한 것이다.
야마무로 신이치(山室信一) 교토대 교수는 그의 책 '러일전쟁의 세기'에서 '20세기 전쟁을 특징짓는 발단이 러일전쟁'이었고, 러일전쟁은 '미국의 시대'를 열었고, 러일전쟁은 '인종전쟁으로서의 세계전쟁'이었다고 규정한다. 특히 그는 러일전쟁을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보조작이나 신문을 통한 국제적 여론조작으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려 했던 선전전으로도 평가한다.
이 세계전쟁의 끝은 '한반도를 누가 손에 넣느냐'였다.
#조선을 노리는 긴박한 국제정세
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은 인천에서 그 신호탄이 터졌다. 당시 상황은 국제적인 관심이 온통 '인천'으로 쏠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국계 저널리스트 앵거스 해밀튼(1874~1913)은 당시 조선을 방문, 러일전쟁 전후의 상황을 신랄하게 그린 책을 'KOREA'란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은 서구인의 '편협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한다. 이 책은 지난해 말,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 보고서'란 이름으로 번역돼 나왔다.
해밀튼은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 제물포는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된다"면서 뛰어난 관찰력과 다양한 정보력으로 인천을 묘사한다.
'1901년에는 93척의 군함이 제물포에 들어왔는데, 그 중 35척이 일본, 21척이 영국, 15척이 러시아, 11척이 프랑스, 5척이 오스트리아, 4척이 독일, 1척이 각각 이탈리아와 미국 군함이었다. 증기선과 범선은 1천36척이었는데, … 이것은 1900년보다 군함이 47척, 상선이 70척 많은 것이다'. 1년 사이 상선은 7.2%가 증가한 데 반해, 군함은 무려 102%나 늘어난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세계 각국이 한반도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사력을 '인천'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중국 군함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해 국제적 경쟁에서 중국은 완전히 배제됐음을 의미한다.
청일전쟁 직후부터 을미사변,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에 이르기까지, 특히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싼 주도권을 놓고 벌인 정치, 외교, 군사적 다툼은 말 그대로 '엎치락뒤치락'이었다.
#아관파천과 그 주역들
러일전쟁 관련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러일전쟁은 '아관파천'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명성황후 시해로 일본이 한국에서 우위를 점하자, 이에 대한 러시아의 반격이 바로 아관파천이었다. 두 사건은 한국에서 자국의 권익을 둘러싼 양국의 대결이었다. 이는 러일전쟁의 서전(緖戰)과도 같은 사건이다"라는 게 최 교수의 얘기다. 최 교수는 또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직접 원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제치고 황후가 청국이 누려온 모든 권익을 러시아에게 넘겨줌으로써 일본의 야욕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아관파천은 1896년 2월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 왕비 노릇을 하던 귀비 엄씨와 러시아 정부 사이에 친러파 이범진이 핵심 연결고리였다. 문제는 조선 정부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취한 일련의 조치가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개인적 차원의 권력다툼에 불과했다는 데 있다.
당시의 재야 지식인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범진 등이 일으킨 이번 거사(아관파천)는 충의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아라사(러시아)를 도와주고 왜국을 방해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권력 다툼일 뿐이었다. …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에는 왜놈들이 국권을 장악하더니 이제는 아라사인들이 장악했다. (러일전쟁이) 시작된 뒤로는 왜국이 다시 뜻을 펼쳤다'고 적고 있다. 황현은 이범진 등이 귀비 엄씨에게 4만냥을 주면서 아관파천을 주도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이범진, 귀비 엄씨 등의 부추김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던 고종은 1년 여 만에 환궁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믿었던 러시아가 고종의 기대대로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재정을 장악하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뒤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서구 열강의 조선에서의 이권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 조선의 '재정권'을 누가 틀어쥐느냐를 놓고 벌어진 '재정권' 다툼은 그 자체로 전쟁이었다.
1897년의 '맥리비 브라운 사건'. 조선의 재정 고문이자 세관장으로 있던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Mcleavy Brown)을 러시아와 프랑스가 연합해 몰아 낸 뒤 러시아인이 그 자리를 차지한 사건을 말한다. 러시아의 알렉세예프가 브라운의 자리에 올랐다. 영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영국은 함대를 제물포에 입항시켜 '시위'를 벌였고, 조선은 브라운을 다시 복직시켰다. 조선의 국고와 세관 업무를 책임진 재정 고문을 각각 러시아와 영국인이 동시에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재정고문은 관세율을 정하고 수출입을 관장하는 등 나라 살림을 총괄했다. 나라의 곳간 열쇠를 남에게, 그것도 외국인 2명에게 동시에 맡기고도 정상적인 국가 운영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러시아는 조선 왕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제물포에 주둔했던 경비정에서 조선 왕실의 오락을 위해 서울 왕궁까지 밴드를 파견해 공연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각국이 조선 진출의 명분으로 내세운 '산업활동'은 정치적 계략을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조선 정부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잇단 전쟁에도 배운 게 없었다
' … 방향을 상실한 무일푼의 조정과 이권을 구하는 끈질긴 청탁자 간의 타협이 벌어질 때 세관장의 영향력은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맥리비 브라운 사건' 당시를 현장에서 목격한 앵거스 해밀튼이 자신의 책 '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 보고서'에서 한 지적이다. 해밀튼은 정책 능력도, 돈도 없는 조선의 재정권을 열강들이 마음껏 쥐고 흔들었다고 본 것이다.
20세기를 목전에 두고도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조차 잡지 못한 조선의 현실이 그대로 엿보이는 대목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94년 청일전쟁 등 열강의 잇단 침략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전쟁은 되풀이 된다'는 점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일본은 1891년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 기공식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진 것을 계기로 '러일전쟁'을 준비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러시아의 진출방향이 동아시아로 확정된 뒤부터 일본은 대러 전쟁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최문형 교수는 일본의 입장에서 청일전쟁은 '오픈 게임', 러일전쟁은 '정식 경기'였다고 비유한다.
이런 가운데, 앵거스 해밀튼의 책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1903년 일본 측에 '한반도에 대한 완벽한 답사 지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노릇이다. 조선 땅에서 곧 전쟁을 일으킬 일본에게 '작전지도'를 미리 만들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은 1899년 울릉도를 점령하고, 경찰서까지 설치한 바 있다. 제물포해전과 독도·쓰시마 해전 등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조선의 지형지물을 정확히 이용한 측면도 없지 않다.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무대로 일대 혈전을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고종은 관직을 돈을 받고 팔기에 여념이 없었고, 주술적 요소에 집착했다고 한다.
'매천야록'에 보면, '충주사람 성강호가 귀신을 볼 수 있다 하여 임금이 그를 불러다 명성황후를 보게 해달라고 했다. … 임금은 황후가 생각날 때마다 반드시 그를 불러들였다. 그는 1년 만에 협판에 올랐고, …'(1899년) '이때 벼슬을 파는 일이 갑오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했다. … 관찰사는 10만 냥에서 20만 냥이었고, 일등 수령은 아무리 적어도 5만 냥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1901년)는 등의 기록이 한두 곳이 아니다.
내치가 어지럽다보니, 통화(通貨)의 문제도 여간 심각하지 않았다.
앵거스 해밀튼은 1903년도 제물포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4가지나 된다고 했다. '정부 백동화', '1급 위조 동전', '2급 중급 위조 동전', '밤에만 통용되는 돈' 등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해밀튼은 또 "일본에서 증기선이 들어올 때마다 많은 양의 위조 동전이 대량으로 들어와 국내(조선)로 밀수된다"고 증언한다. 1902년 1~12월 사이, 제물포 세관에서 압수된 동전은 무려 357만3천138개(미가공 동전 포함)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인천 등 개항지의 일본인 상점에는 '비범한 경지'에 이른 모조품이 넘쳤다고 한다. 앵거스 해밀튼은 석유, 담배, 통조림, 우유, 버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조품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위조화폐와 모조품이 넘쳐나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잇단 전쟁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또다시 벌어질 '세계전쟁'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못한 사이 백성들은 '강제병합'이라는 전쟁의 결과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정진오기자
※ 전문가가 본 러일전쟁 의미
"인천의 지정학적 중요도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인천은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사진)은 "인천은 한반도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통로로 최적이다. 중국 등으로도 루트가 열려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인천 제물포는 청일전쟁(1894~1895년)과 러일전쟁(1904~1905년) 당시 일본군의 상륙지이자 병참기지가 됐다. 특히 인천 앞바다는 러일전쟁이 시작된 장소이다. 일본군은 제물포해전에서 기선을 제압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인천이 화약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만일의 경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천의 위기'는 곧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인천·서해 평화지대' 조성과 균형감 있는 실리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며 "인천이라는 도시는 평화 전략이 중요하다. 대립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남북 관계에서) 중앙정부가 막히면 지방정부가 교류를 통해 푸는 등 보완적 기능에 인천이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연구위원은 "러일전쟁 당시 조선정부는 친러로 기울어진 모습을 보였다"며 "한 쪽으로 치우치면 큰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또 "실체를 보면서 실리외교를 해야 한다"며 "지혜로운 외교정책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러일전쟁은 우리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러일전쟁으로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 됐다.
김 연구위원은 "러시아 함대는 제물포해전에서 패했지만 애국심의 표본처럼 여겨져 영웅으로 귀환했다"며 "일본도 러일전쟁의 승리를 미화, 극화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러일전쟁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시각만 있다"며 "전쟁터였던 인천, 한국의 관점에서 러일전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연구위원은 일본, 미국 등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하는 등 오랫동안 러일전쟁을 연구해 오고 있다.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