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2 - 1970년대 경기신문과 지역언론 윤진현 인하대 강사]
※ 윤진현 인하대 강사
-인천 민예총 정책위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교육위원
-인천노동문화연구소 '오만가지' 대표
통폐합신문 역사·정체성 정립… 각각의 기초자료 정리 우선을
당시 정권의 위치는 논조제약 요인… 그럼에도 기사에는 '흘겨보는 시선'
■ 인사를 대신하여
저는 근대문학 전공자라 일제 강점기가 제 주요 연구시기인데, 이 시기 인천을 공부하다가 나름 깨닫고 웃은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동네에서 일하고 노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1920년대는 인천에서 지역인에 의한 문화영역이 본격적으로 개척되고 확장한 시기입니다. 이때 중심이 되었던 그룹이 지역의 뜻있는 청년들이 모두 모여있던 '제물포청년회', 인천 출신으로 서울 배재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이 결성한 '인배회', 인천에 상급학교가 없던 시절이라 기차 타고 서울로 통학하던 사람들이 모인 '경인기차통학생회', 내리교회 청년 모임인 '엡ㅤㅇㅝㅅ청년회' 등이 그것이었는데, 단체는 여럿이었지만 사람은 비슷비슷하였습니다.
지역언론은 지역학의 발전을 고무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역학의 발전없이 지역 언론의 깊이있는 확장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역에는 지역의 역학이 있습니다. 전공자·전문가를 찾아서 공부를 시키면 더 좋긴 좋은데,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으니 사람을 봐가면서 떡밥(?)을 던져서 제풀에 신이 나서 낚시를 물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이야기'나 '인천인물 100인' 등 경인일보에서 낸 몇몇 책들은 지역 연구자들에게 꽤 좋은 밑천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경기신문의 기원
'경기신문'은 모두 아시겠지만 1973년 9월 1일 당시 경기(인천 포함)지역의 주요 신문 3개사가 통합하여 출범한 신문입니다.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소위 유신이념이라는 것이 국기를 대신하고 있던 시절, 1도1사 정책이라는 당국의 언론통폐합 정책에 따라 '경기매일신문', '경기일보', '연합신문'이 통합, 출범한 신문이었습니다.
소위 언론통폐합이라는 것은 1942년 일제에 의해 처음 시행된 이래 1973년에 두 번째, 1980년에 세 번째로 시행된 바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일제에 의해 시행되고 일제에 의해 길러진 그룹에 의해 두 번째로, 그 그룹을 모방한 그룹이 세 번째로,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일이 네 번째로 생기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이 되자마자 인천에서는 '대중일보'가 창간되었습니다. '대중일보'는 1973년 8월 31일까지 이어졌습니다. 1960년에는 '인천신문'이 창간했고, 1960년대 후반에 수원으로 본사를 옮겨 '경기연합일보, '연합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였습니다. 또 1966년 창간된 '경기일보'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방 이후 인천에서 창립된 주요 언론의 역사를 모두 이어받은 것이 '경기신문'입니다. 그 과정이 가슴 아픈 것이기에 사실 '경기신문' 그리고 여기에서 제호를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 '경인일보'의 책무는 더욱 막중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에야 '대중일보'가 처음으로 '경인일보'로부터 호출되고 있으니 '경인일보'가 그같은 책임감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은 오늘이 첫날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 이같은 노력이 계속 이어지기 바랍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때문에 간과되기 쉬운 '경기일보' 또한 다시 그 이름이 복원될 수 있기 바랍니다. 물론 여기에는 모체가 되었던 '연합신문'의 역사도 포함됩니다.
현재 경인일보사에는 1970년대 기준 '연합신문' 및 '경기신문'이 13개월 125일분이 보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행히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대부분이 소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9일분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심각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힘들고 어렵고 먼 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와 정체성을 정립하는 가장 빠른 길이 기초가 되는 자료를 정리하는 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세 신문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더 미룰 수는 없을 듯합니다.
■ 1970년대 '경기신문' 기사를 읽는 하나의 방법
통폐합으로 출범한 신문이라는 것은, 정확하게는 언론통폐합이라는 야만스러운 결정이 가능한 시대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게 당시의 논조를 제약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유신과 긴급조치, 전제적 군주를 방불케하는 당시 대통령에 대한 편파적이고 찬양 일변도의 기사는 사실 아주 읽기 힘듭니다. 오늘날로 비긴다면 연예인 광팬에게나 가능할까, 논리적인 인과나 사건 선후를 따지지 않을 정도로 정권의 결정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판적인 논조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통폐합 후 일련의 사회비판적인 기사는 냉소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안쓰럽게 느껴질 만큼 '흘겨보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지방행정이나 지방정치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두 알만한 인사(人士)와 알만한 처지로 진행되기 마련이었습니다. 비판과 견제를 한다고 해도 상시적으로 얼굴 맞대고 있는 처지에 직설적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우회는 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동네 이야기를 하기 위해 펜은 펜이되 칼처럼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이 시기 기자들의 고투는 다시 음미해봐도 좋을 것입니다.
※ 토론회 이모저모
대중일보는 사라지지 않았다… 28년역사 통·폐합 명맥 이어
김창수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은 "경기매일신문의 뿌리인 대중일보는 오늘날 경인일보의 뿌리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김 연구위원은 1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대중일보와 경기신문, 그리고 경인일보'란 주제의 경인일보 창간 51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이 같이 밝히고 "경인일보가 51주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1960년 창간된 인천신문에서 이어지는 51년을 말하는 것인데, 그 뿌리는 1945년에 창간한 대중일보에 있다"고 지적했다.
김 연구위원은 "1973년 유신정권에 의해 진행된 경기매일신문과 경기일보, 연합신문 등 간 통폐합 과정에서 다시 한번 뿌리를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경인일보의 역사는 대중일보의 후신인 경기매일신문의 28년 역사(1973년 기준)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게 맞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중일보는 한국전쟁때를 제외하곤, 인천신보로 이어지고, 이후 기호일보와 경기매일신문 등으로 이어진다"며 "조만간 경인일보 내부에서도, 그리고 밖에서도 논의가 돼 66주년이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윤진현 인하대 강사는 '1970년대 경기신문과 지역언론'이라는 발제에서 지역언론의 지역화가 더욱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윤 강사는 "인천의 첫 소극장은 당초 알려져 있는 돌체가 아닌 깐느라는 연극카페였다는 것을 1974년 경기신문의 짧은 기사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시도들이 크고 중대한 사건들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소한 단신 하나라도 역사가 될 수 있도록 지역언론의 더 큰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뭔가 큰 자리를 잡고, 큰 판을 벌여야 인정해주는 풍토가 사무치고 있다"며 "골목을 누비는 시선이 지역언론에 보다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기조발제에서 "지역언론이 진정한 지역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보다 주민속으로 다가가야 한다"며 "이 같은 측면에서 예전 동아일보가 진행했던 브나로드 운동을 인천 버전에 맞게 다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엔 대중일보 창간 당시 인쇄책임을 맡았던 이종윤 선생의 손자인 이철기 동국대 교수의 부인 김정화 교수가 나와 끝까지 지켜보기도 했다. 김 교수는 "대중일보가 나중에 우파적인 논조를 폈다고는 하지만 구성원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며 "이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이현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