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904년 2월 10일 개전을 공식 선언한다. 이틀 전인 8일 '제물포 해전'을 도발한 일본군은 곧바로 서울로 진격했다.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속셈이었다. 일본에게 한반도는 만주대륙 진출을 위한 발판이었다.
일본의 한반도 침탈 야욕은 '한일의정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 발발 움직임을 감지한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해 국가의 안위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수도를 점령당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로 징발할 수 있게 됐다.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병참기지화 전략은 적중했다. 특히 해상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대한해협이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러시아 해군 기지인 동해의 블라디보스토크항과 서해의 뤼순항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 러시아 해군의 치욕
일본 해군은 제1함대와 제2함대를 주력함대로, 제3함대를 예비함대로 편성했다. 제2함대는 제물포 해전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고, 제3함대는 러시아 함대의 대한해협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진해를 점령했다. 중국으로 향한 제1함대는 뤼순항을 공격했다. 뤼순은 러시아 해군기지가 있는 곳이자 만주 진출의 거점이었다. 일본 함대는 뤼순항 앞 해상에 상선을 침몰시켜 출입로를 봉쇄하거나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폈다. 러시아군은 해안포 사격과 기뢰 부설로 대응했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는 오랜기간 뤼순항에 발이 묶이는 결과가 초래됐다.
러시아는 뤼순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유럽 발틱 함대에서 새로운 함대를 구성, 파견키로 했다. 그러나 작전은 손조롭지 못했다. 1904년 5월 출정 명령을 받았는데, 이듬해 5월에야 극동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장난 함정을 수리하고 기나긴 항해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일본 함대는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뒤 진해항에 집결해 만반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 지원 함대가 결국 대한해협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할 것으로 판단, 울진~울릉도~독도~일본 간 해저 통신선과 망루를 설치하기도 했다. 울릉도와 독도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앞바다에서 첫 포성이 울렸다. 러시아 함대가 쓰시마해로 진입한 것이었다. 이 해전은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귀결짓는 사건이었다.
일본 함대의 전함과 함포, 그리고 전술 운영 능력 등은 러시아 함대를 능가했다. 일본 함대의 함포 공격을 받은 러시아 함대는 잇따라 침몰하거나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해전에서 러시아군 전사자는 5천45명에 달했다. 부상자도 800명을 넘었다. 쓰시마 해전은 러시아 함대 300년의 역사 중 가장 치욕적인 전투로 기록된다.
■ 피바다가 된 한반도와 만주벌판
일본은 러일전쟁 전인 1903년 11월부터 제물포항과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병력을 상륙시켰다. 본격적인 파병이 이뤄진 것은 제물포 해전이 끝난 직후였다. 일본은 한반도 국경지대인 압록강으로 신속히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 사이 일본군과 러시아군은 평양과 정주 등에서 몇 차례 교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4월 압록강 이남 의주 지역에 집결, 도강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즉각 대응사격을 가했다. 일본군 진영에서는 날아오는 총탄과 포탄에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일대 위기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포병부대의 엄호사격에 힘입어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공격을 재개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화력에 점차 밀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의 최대 격전지는 만주였다. 일본은 압록강 주변 러시아군 진지를 잇따라 장악하며 만주 전선으로 진군했다.
또 뤼순항을 함락, 랴오둥 반도 등으로 추가 병력을 보내 러시아 만주군이 집결해 있는 내륙으로 파고들었다. 만주 전투는 치열했다. 랴오양, 샤허강, 선양 등지에서 밀고 밀리는 격전이 장기간 지속됐다. 참호를 파고 각개 전투를 벌이거나, 대포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장기화는 양국에 모두 불리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는 약 27만명에 육박하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사망자는 5만명에 달했다. 일본도 총 27만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전사자도 8만6천명이나 됐다고 한다. 일본은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러시아도 공산주의 혁명 등 내란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결국 미국의 주선으로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 항일의병·러시아군 공동작전
1905년 7월초 '선견 한국분견대' 결성… 의병-러 군사연합 국권회복투쟁 벌여
러일전쟁 전후 시기 함경도 등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활발한 항일 의병활동이 전개됐다. 최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한반도에서 전개된 러일전쟁 연구'에 따르면 러일전쟁 전후 유림(유인석 등), 군인(김인수·추명찬·김원교 등), 관리(이범윤 등) 등 다양한 출신 계층이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다. 특히 김인수 부대, 이범윤 부대, 함경도 한인포수회 등은 러시아군이 1905년 7월 초 결성한 '선견한국분견대'를 통해 공동작전을 펼쳤다. 러시아군과 연대하던 의병부대들이 본격적으로 단일 지휘 체계 아래 군사활동을 벌인 것이다.
일본군은 앞서 6월 원산, 길주 등을 잇따라 장악하며 두만강 방면으로 진군했다. 다급해진 러시아는 일본군이 연해주로 넘어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두만강 일대에 병력을 파견한다. 일찌감치 러시아군으로 활동했던 김인수도 이때 기병대를 이끌고 작전을 수행한다. 김인수 부대는 함경도 일대 부령, 함흥, 원산, 길주 등지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의병부대를 지원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자 항일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많은 인사들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망명해 다시 의병부대를 조직한다. 이범윤·홍범도·유인석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책의 저자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심헌용(48) 선임 연구원은 "의병부대 활동은 한반도와 만주에서 벌어진 제국주의 전쟁에서 대한제국이 객체로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면서 "의병부대는 러시아군과 연합해 국권 회복 투쟁을 벌였다"고 했다.
※ 러시아 Vs 일본군대 전투력 비교
러 극동군 9만여명-일본군 14만2천명… 日, 최신식 전함 보유 해군력서도 압도
새로운 무기의 출현은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는다. 군대 조직과 운용이 달라지고,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가능해진다. 러일전쟁에서 구사된 기습전, 참호전, 첩보전 등은 오늘날 현대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국 뤼순항 전투 등 해상에서도 다양한 전술이 운용됐는데, 일본과 러시아 함대가 '기뢰'를 적극 활용한 점이 눈에 띈다. 러일전쟁은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육·해군 병력의 동원, 전함을 비롯한 최신식 전투 장비의 도입 등 전술 다변화 측면에서 전쟁사의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시기 일본군은 대략 장교 8천명, 병사 14만2천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러시아 극동군의 규모(장교 3천200명, 병사 9만4천명)를 넘어선 것이었다. 해군력에서는 일본이 러시아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표 참조
일본은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영국 등 해외로부터 최신식 전함을 대거 도입했다. 일본 함대는 속도가 빨랐고, 화력도 뛰어났다.
러시아의 패전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러시아 전사연구소는 국가 재정난 등으로 인한 최신식 무기 도입 지체, 탄약과 병기(장비) 부족, 지휘관의 무능력, 시대에 뒤떨어진 전술 운용, 극동지역 국경 강화에 대한 인식 결여 등을 그 원인으로 꼽는다. 이에 비해 일본은 전쟁을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해 왔다. 훈련된 병사들은 정신적·육체적으로 강했고, 한반도와 주변 해역을 사전 장악해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 있었다.
/임승재기자
※ 일본해군의 영웅 '토고 헤이하치로'
이순신장군 존경 '학익진법' 철저 연구… 러 발틱함대 궤멸 '丁자형 전법' 만들어
토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의 '영웅'이다. 유럽의 시각에서 '동방의 넬슨'으로 불리기도 하는 토고는 정작 조선의 명장 이순신을 자신의 스승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이는 돌링 킨더슬레이(Dorling Kindersley) 출판사가 2009년 영국에서 출간한 '전쟁(WAR)-고대 이집트에서 이라크까지'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 책 '러일전쟁 편'에서 토고(사진)를 소개하면서 '동쪽의 넬슨이란 별명이 붙은 토고는 그 자신이 16세기 해군 대제독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그는 종종 이순신을 그를 이끌어주는 영혼이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토고가 이순신의 전술을 스스로 배우고, 이순신의 정신을 떠받들었다는 점은 일본인들이 먼저 인정한다.
"이순신은 일본의 적이 아니라 일본의 선생이다." 우리에게는 추사 김정희 관련 자료를 과천문화원에 돌려준 것으로 잘 알려진 후지츠카 아키나오(1912~2006)가 한 말이다.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토고가 이순신의 '학익진법'을 철저히 연구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킨 '정자(丁字)형 전법'을 썼다고 했다. 아키나오는 또 토고가 '머리에 신경이 제거된 듯하게 언제나 평연한 모습'을 보였다는 러일전쟁 관전 영국인 무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평상심도 이순신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이 얘기는 과천문화원이 2008년 발간한 '추사 자료의 귀향'이란 책자에 실렸다.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토고가 이순신에게서 스스로 배운 것을 '한·일 간의 고등 교류'라고 불렀다.
/정진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