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차 세계대전' 또는 '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 등으로 불리는 러일전쟁은 1905년 끝났다. 첫 전투는 인천(제물포해전)에서 있었으며, 마지막은 대한해협(쓰시마해전)과 울릉도·독도 해역이었다.
전쟁 직접 당사국인 러·일은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이후 역설적이게도 더욱 긴밀해졌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은 종결됐지만 전쟁이 시작된 땅, 한반도에서는 1905년 이후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됐다. '보호국'이란 허울을 넘어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이 또 다른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 속에서 수많은 항거가 있었다. 또한 일본 편에서 나라를 파는 일에 앞장선 이들도 있었다.
청일전쟁이 조선 식민지화의 서막이었다면 러일전쟁은 그 '종결자'였다.
#국권피탈과 항거
러일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나 일본은 각기 전쟁 명분으로 '조선의 독립'을 내걸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바로 '식민지화'에 착수했다. 반발도 거셌다. 국권을 통째로 빼앗기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조선 말 한반도에 머물렀던 미국인 교육가 H.B.헐버트가 1906년에 펴낸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신복룡 역주)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그대로 웅변해준다.
야트막한 언덕 앞에 십자가 모양의 처형대가 세워졌고, 거기에 한국인 3명이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처형된 끔찍한 장면과 이들의 사망사실을 확인하고 무심히 되돌아 나오는 일본 군경의 모습(사진 2). 처형당한 조선인들의 죄명은 일본의 무상 토지 몰수에 항거하여 철도를 파괴했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이 사진으로 공개될 수 있었던 것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항거'를 막고자 한 일본의 수법이었을 것이다.
헐버트는 "(1905년의)일본인들은 한인들을 합법적 노리개로 생각했다"고 했다. 또 '군사적 목적'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전국 각지의 토지를 무단 점유했다고 했다. 여기에 항거해 일제의 철도 공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조선 백성을 마구 죽인 것이다. 이런 현실은 "1905년 동안에는 국민들을 일본인들로부터 또는 조선의 관리들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정의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헐버트의 말에 응축돼 있다.
매천 황현도 그의 책 '매천야록'에서 "(1905년 7월부터 왜놈들은)욕심나는 땅이 있으면 군용지라 하면서 빼앗아 갔다"고 증언한다. 헐버트의 얘기와 같다.
일본은 또한 러일전쟁에서 독도의 중요성을 실감했고, 전쟁 직후 곧바로 독도 강점에 나섰다. 황현은 역시 '매천야록'에서 "(독도는)예전에 울릉도에 속했는데, (1906년 4월에)왜놈들이 자기 영토라고 우기며 살펴보고 갔다"고 지적했다.
이런 일본의 국권강탈 시도에 대해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열사들은 '자결'로 항거했다.
'항거'의 여러 모습 중에 '매천야록'에 보이는 '여성 노비의 꾸짖음'이 눈길을 끈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인 군부대신 이근택이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내가 다행히도 죽음을 면했소"라고 말하자, 그 부인이 시집올 때 따라온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칼을 들고 나와 "이근택아, 네가 대신까지 되었으니 나라의 은혜가 얼마나 큰데, 나라가 위태로운 판국에 죽지도 못하고 도리어 '내가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나 돼지보다도 못하다…"면서 꾸짖었다는 것이다.
황현은 이 얘기 말미에 "그 계집종의 이름은 잊어버렸다"는 말도 적음으로써, 당시 세간에 신빙성 있게 떠돌던 말임을 짐작하게 한다.
국권을 빼앗기게 됨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으며, 국권을 내준 역적들에 대한 암살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를 환영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다. 송병준 등이 주도한 일진회 등이 대표적이다.
'독립'과 '식민' 사이에서 국론이 분열된 것이다. 토지 수탈에 항거하다 처형된 백성들의 참혹한 모습과 이들을 죽인 일본 경찰의 무덤덤한 모습이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러일전쟁 후 인천은
일본인들은 러일전쟁 직후의 인천을 얘기하면서 '일본 동포가 건설한 식민지'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인천에 있던 일본인들은 1908년에 '인천개항 25년사'란 책자를 두 권 발간했다. 이들 책자는 2004년도에 인천시 역사자료관에서 새롭게 펴낸 바 있다.
일본 이사청(영사관) 이사관이던 시노부 준페이 등이 만든 '인천개항 25년사'에서는 "러일전쟁 후에 인천의 발전은 더욱 뚜렷하게 되었다"면서 일본 황태자가 1907년 인천을 방문한 것을 영원히 기려야 한다는 내용 등을 싣고 있다.
또한 당시 '조선 타임즈'의 이사로, 일본인 저널리스트였던 가세 와사부로가 쓴 '인천개항 25년사'에서는 일본 세력의 확대, 인구 증가, 각종 기관의 정돈, 무역의 진보, 운수 교통의 발달 등으로 러일전쟁 직후 인천의 달라진 모습을 대별하고 있다.
가세 와사부로는 "일청전쟁으로 정치적으로는 청나라 세력을 무너뜨렸지만 청상(淸商)의 상업적 잠재력은 일러전쟁 당시까지 여전하였다. 그동안에 인천항에서 우리 상인과 청나라 상인의 경쟁은 성쇠를 되풀이 하여 확실하게 상권을 수중에 장악한 것은 일러전쟁 후이다. 단지 제물포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졌던 일개 어촌이 지금은 거류 상인의 경영으로 인천항이 천하에 알려졌는데 이는 불과 25년의 세월에 이루어진 번영이다"고 쓰고 있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가진 '인천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냉혹한 국제정세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을 보면, 한 편의 잘 짜인 각본을 보는 듯하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부터 박탈했다. 1907년에는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그리고는 '대한제국'이란 명칭도 못 쓰게 했다. '독립국가'의 이미지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독립국이란 인상이 짙은 '대한제국'이란 이름을 중국의 속국 냄새가 여전한 '조선'으로 바꾸게 했다. 그리고는 1910년 국권을 송두리째 강탈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국제정세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심헌용 선임연구원은 "일본은 러시아에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1905년에)곧바로 대한제국을 합병하지 않은 것은 평화적 절차에 따라 합병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은 대외적으로 신중을 기하였다"고 말한다.
러시아도 자국 이익에 따라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에 동의하고, 종전에 합의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이 2010년에 펴낸 '최신 러시아 역사'를 경인일보 취재팀이 2011년 봄, 러시아에서 구입해 인천국제교류센터 측의 협조를 받아 번역한 바에 따르면, 이 같은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포츠머스 회담 이후 러시아와 일본과의 관계는 급격하게 좋아졌다.1907년 1월 러일간 합의가 이뤄졌는데, 이 합의는 양측이 서로간의 지역적 일체성을 인정하고 만주에서의 영향권 경계를 정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한국을 특별히 '일본의 이해관계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일본은 몽고에서의 러시아의 우월권을 인정했다"고 '최신 러시아 역사'는 기술하고 있다.
러시아는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당초 약속을 어기고 조선 대표를 회담장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미국은 국권피탈을 막아보려는 고종의 애절한 호소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라 안에서 거세게 일던 정치개혁의 요구를 차단하면서, 외세를 끌어들여 다른 외세를 견제하려 했던 고종의 시도는 냉혹한 국제정세 속에서는 도저히 먹혀들지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미국의 도움을 크게 받았던 일본은 1930년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과 등을 돌리게 됐다. 일본은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외교계의 금언이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다.
※ 영국 언론인이 기록한 조선군대 실상
산비탈서 재배 '야생 쌀' 군량미로 활용…
조선 말기 조선군의 군량미는 어떻게 조달했을까. 임진왜란 때 유명했던 승병(僧兵)은 존재했을까.
어뢰 함대와 기관총이 등장한 러일전쟁 시기에 조선 군인들의 사정은 딱하기만 했다. 당시 조선은 러시아나 일본과 군사적으로 맞붙을 만큼 현대식 무기로 무장돼 있지 않았다.
영국계 저널리스트인 앵거스 해밀튼(1874~1913)이 러일전쟁 당시 조선을 방문, 시골 구석구석까지 살피고 쓴 'KOREA'(번역서명:러일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 보고서)란 제목의 책에는 러일전쟁 시기 조선군의 뒤처진 현실이 잘 묘사돼 있다.
해밀튼이 발품을 팔아 기록한 이 책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군사적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우선 '군량미'에 대한 부분이다. 해밀튼은 조선의 쌀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논에서 키우는 쌀로, 이는 밥을 짓는 데 쓴다. 둘째는 고지대 쌀인 밭쌀(춘곡)로, 이는 쌀가루나 막걸리 제조용이다. 셋째는 산비탈에서만 재배하는 '야생 쌀'이다. 조선 당국은 이 '야생 쌀'을 군량미로 삼았다는 것이다. 작고 단단해 날씨 변화에 잘 견뎌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군량미로 썼다는 게 해밀튼의 분석이다. 저지대 쌀은 5년을 보관하지만, 이 산비탈 '야생 쌀'은 10년 동안 끄떡없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비상 전투식량'으로 2.5일분의 비스킷을 배낭에 휴대했다고 한다. 또한 '승병(僧兵)'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해밀튼이 러일전쟁 직전 5주 동안 강화도에 머물면서 적은 '전등사의 승려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전등사의 승려들은 최근까지 군대 계급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국가 위기시에 군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항상 전시에 대비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 지원금, 식량, 무기를 지급받는다"고 해밀튼은 기록했다. 승려들이 조선말까지도 예비전력 부대로 기능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 밖에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최초의 근대식 군함'에 대한 기술도 있다. 해밀튼은 "조선 해군에는 23명의 제독과 최근까지 일본 증기선 회사의 소유였던 철제 석탄 거룻배가 있다"고 쓰고 있다. 해밀튼이 이 책을 쓴 게 1903년 12월이기 때문에, 이 '거룻배'는 군함으로 들여왔으나 그 군함 구실을 하지 못하고 러일전쟁 직후 화물선으로 다시 바뀐 '양무호(揚武號)'였을 것이다. 이 양무호는 1903년 4월, 경남 출신으로 나중에 '인천사람'이 된 신순성에 의해 인천항에 입항했다. 양무호는 최초의 근대식 군함이었으며, 신순성은 그 함장이었다. 낡아서 군함의 역할을 할 수 없었던 양무호는 러일전쟁 직후 화물선으로 개조됐으며, 1904년 11월에 조선은 다시 '광제호(光濟號)'를 군함으로 쓰기 위해 들여왔다. 광제호의 함장도 역시 신순성이었다. 그런데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인천항에 정박중이던 광제호에서는 '매국노' 이완용이 일본 통감 소네 아라스케와 함께 '함상 연회'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이완용 평전'은 이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이 연회는 '광제호 함장이 개최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지은이 김윤희 씨는 이 함장의 이름을 적시하지는 않았는데, "(신순성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된 전날 밤에 광제호에 걸렸던 태극기를 내려 집에 보관했다"는 얘기('인천인물 100인', 2009, 경인일보 특별취재팀)를 바탕으로 한다면, 당시 연회를 개최한 함장도 신순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광제호는 이토 저격 다음 날에 인천항에서 이완용 등 조문 일행을 싣고 중국 다롄항으로 향했다.
/정진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