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접어들자마자 한반도에서 일어난 러일전쟁.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러일전쟁을 연구하는 세계 각국의 학자들은 많다. 러시아와 일본 등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전쟁을 보는 미묘한 차이가 읽힌다. 또한 러일전쟁과 '제국주의'니 '세계 0차 대전'이니 하는 용어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서로 이견이 있다는 점도 확인하게 된다. 반면, 당시 열강들이 한반도를 놓고 서로 경쟁한 결과가 러일전쟁이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 시작이 인천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경인일보는 러일전쟁을 연구하는 러·일 양국 전문가를 포함해 '제3의 시각'을 위해 영국인 학자와 인터뷰를 실시했다. 인터뷰는 7월 말부터 이메일과 전화로 했다. 지면 관계상 일부 질문 문항을 빼고, 분량은 줄였다. 일부 문항의 경우 3명 모두 답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인터뷰 전문(영문)은 인터넷 홈페이지 참조.

■ 러일전쟁 발발 원인은 뭐라고 보나.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세계 열강의 각축전으로 보는지.

-존 채프먼=1905(1904)년 전쟁이 발발한 근본적인 이유는 동북 아시아의 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독점하려는 이웃국가들의 관료와 상인들의 야욕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점적 통제권을 가지려는 야욕을 좌절시키기 위해 1895년 개입했고 이것이 끔찍한 전쟁으로 변모하게 됐다.

-파블로프=러일전쟁은 조선과 만주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던 두 라이벌 국가에 의해 촉발됐다. 따라서 이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의 첫 번째 총성은 1904년 2월 9일 4시30분에 제물포에 있던 포함에서 울렸다. 첫 번째 목표물은 러시아 포함 '카레예츠(한국사람을 의미하는 말)'였다.

카레예츠는 서울 주재 러시아 대사 알렉산더 파블로프(Alexander Pavlov)가 비밀 통신원과 함께 뤼순항으로 보낸 배였다. 그는 배를 통하지 않고는 한국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당시 요시다 대위가 서울의 통신망을 끊어놓아 통신이 불가능했다. 일본 함대는 6대의 순양함(cruise)과 8대의 포함으로 이루어졌다. 3천명의 군사를 태운 함선이 함대의 경호를 받았다. 3천명의 군사는 제물포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3발의 어뢰가 발사됐지만 하나도 적중하지 못했다. 뤼순항에서 일본군이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러일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는 2월 10일에야 선전포고를 했다. 실제 선전포고 이전부터 전쟁은 시작됐다.


-이나바 치하루=전쟁의 원인을 제국주의에서 찾기는 어렵다고 본다. 전쟁의 원인을 제국주의에서 찾는 것은 오히려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1904년 2월 9일 뤼순항에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이 벌어졌다. 일본 해군은 같은 날 인천에서도 기습적으로 러시아 전함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10일에서야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을 두고 식민지 확대를 위한 힘의 대결로 보기는 어렵다. 러시아는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하기 이전까지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은 오래전부터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싶어 했다. 사실 일본은 1903년 5~6월부터 전쟁준비를 시작했다. 일본이 이렇게 전쟁을 갈망했던 이유는 조선에 있다. 일본은 1870년대 이후부터 조선을 통치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청일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의 통치권을 얻기를 원했다. 그 당시만 해도 러시아가 일본에 비해 훨씬 힘이 강했다. 러시아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한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극동지역에 힘을 집중시키기 전에 일본은 한국에 대한 강한 교두보를 마련해 나갔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일본은 1905년 2월 러시아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러일전쟁이 발발됐다.

■ 각국에서는 러일전쟁의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파블로프=러시아는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점쳐졌다. 그런 러시아가 맺은 포츠머스 조약은 일반적으로 차르와 러시아 외교관들의 성공적인 외교였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사절단의 대표였던 전 재정부 장관 비테(Yulii Witte)의 공적이 특히 컸다고 본다.

하지만 조약의 내용이 러시아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정부 안팎에서 러시아에 안 좋은 이미지를 가져오기도 했다.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가지고 있던 야심을 버려야 했고, 조선이 일본의 통치국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또한 만주에 주둔할 수 없게 됐으며 극동지역에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이나바 치하루=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 전쟁 발발 당시에 일본은 만주까지 점령하겠다는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다. 전쟁 초기 일본정부는 중국에 러일전쟁 기간 일본군에 대해 중립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 중국에 만주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1904년 2월 한반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한국을 점령했을 때, 일본은 러시아 군이 만주에서 주둔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한반도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1905년 9월 평화협정에서 일본은 러시아에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일본은 만주에서 이익을 얻어야했다. 그 결과 일본은 중국과의 약속을 깨고 만주를 점령해 이득을 챙겼다. 신의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은 큰 성과를 거두게 됐다. 조선과 만주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

 
 

■ 영일동맹에 대한 평가는.

-존 채프먼=일본의 외교정책은 영국이 베푼 혜택과 미국의 물밑 지원 아래 이뤄져 갔다. 일본은 이런 지원을 통해 현대 해군 기술을 배울 수 있었고, 오랜 기간 전쟁을 수행하더라도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됐다. 1900년대 직후 일본은 영국, 독일과 동맹을 맺고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독일과의 동맹을 거절했다. 독일은 의화단 사건(Boxer Intervention)이 진행되던 중 중국에서 한 행동으로 일본군을 소원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는 것과 함께 일본이 러시아와 직접 상대하도록 했다. 영국은 실질적으로 1902년 2월에 사인을 하기 전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서도 전쟁 등에 대한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파블로프=러시아의 입장에서는 1902년 영일동맹의 체결이 러시아에 굉장히 큰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은 분명하다. 영일동맹이 없었으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나바 치하루=일본은 조선에 대한 특별한 권리를 받길 원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미래에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일본은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기 전에 행동을 개시해야 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뤼순항과 인천에서 러시아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 당시 영국은 일본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극동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영국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이 러시아에 질 것이라고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은 실제로는 세계에서도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패배를 예상했더라도 영국은 일본이 지길 원하지는 않았다. 영국은 자신이 중국 중앙부에서 갖고 있던 특별한 권리를 보호해야했다. 영국이 군사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도 러시아가 극동지역으로 힘을 확대하는 것을 막아야했다. (일본은 영국을 통해 다른 국가의 중립을 얻어냈고, 영국은 러시아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력을 줄일 수 있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영일동맹은 상호간에 큰 도움이 됐다.

■ 러일전쟁은 '세계 0차 대전'이라고도 불린다. 많은 세계열강들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러일전쟁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

-존 채프먼='0차대전'이라는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현대전을 기획하는 방법이 융합되면서 20세기 세계분쟁은 통치할 수 있는 대상이 됐다. 특히 일본은 혁명에 의한 전쟁이라는 콘셉트로 전쟁을 지원하면서 군대의 승리를 크게 도울 수 있었다. 국민주의나 혁명사회적 힘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일본은 러시아의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적국 사회나 지배체제의 불통합을 촉진하는 등의 행동으로 군대의 승리에 거대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중 프러시아 군에 의해 개척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 혁명을 촉진시키려고 시도한 일본의 모습은 1차대전과 2차대전, 1950년대와 60년대에 한국과 베트남 분쟁에서 정치전의 견본이라는 점에서 주목돼야 한다.

-파블로프=러일전쟁을 '세계 0차대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러일전쟁은 지역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적 분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주요 참가국들도 러일전쟁을 세계전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본 내각은 1903년 12월 30일 특별회의를 열었다. 이곳에서 장관들은 '황인종 위협'의 공포를 막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이 미래에 러시아와 연합할 수 있다는 우려 정도만을 제기했다. 러시아의 시각에서도 전쟁은 지역적 분쟁 그 이상은 아니었다. 전쟁 전 평화적인 시기에 (세계 여러 국가의) 10만명의 군대가 극동지역에 주둔했지만 이에 비교해 봤을 때 8%미만의 군대만이 극동지역에 주둔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주둔하는 해군의 수도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이 1902년 일본과 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이 타국으로부터 공격받을 경우 힘을 실어줄 것으로 약속하면서 전쟁이 확대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극동지역 전쟁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기울일 만한 관심사항이 없었다.

-이나바 치하루=러일전쟁을 '세계 0차대전'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물론 세계 열강들은 러일전쟁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물론 일본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만주가 일본과 러시아의 전장으로 변하는 등 세계적 전쟁의 양상을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세계전쟁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 러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유는.

-존 채프먼=일본사회는 1859년부터 1902년까지 기나긴 시간동안 외부의 통치를 경험했다. 그리고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현대화된 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외부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일본은 영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끼어들길 원하지 않았다.

해군제독인 곤베이 야마모토 장군이 이를 강조했다. 그는 전투에서 일본만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영국군으로부터는 재정적인 도움만 얻고자 했다. 그들 스스로 중국과 조선에서 승리를 얻으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땅이 국제적 전쟁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조선과 중국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 러일전쟁에서 인천지역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보나.

-존 채프먼=극동지역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는 러시아의 행동에 영국은 완전히 반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전쟁 초기 제물포 전투로 인해 잠겨가는 러시아 함대의 선원을 구해내려고 했다. 허무주의적인 전쟁에서 인간의 가치를 좀 더 중요시했다는 증거의 장소로 인천을 보고 있다.

-파블로프=러시아 해군은 제물포에 석탄 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부영사는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이곳을 러일전쟁의 첫 번째 장소로, 바랴크호 전투와 연결돼 있는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 조선과 중국은 왜 이렇게 무능했나. 세계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어떠했나.

-존 채프먼=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한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세계 어떤 힘도 개입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서 확보한 강력한 위치를 위협해왔다. 조선 정치인들은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 속에 선호하는 부류에 따라 내부 파벌을 만들고 분할됐다. 사실 조선 황제는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길 원했다.

그러나 러시아나 일본이 조선의 중립을 인정해 주기에 한국군은 너무 약했다. 조선과 비슷한 사례를 중국에서 볼 수 있다. 중국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외국자본의 침입이나 군대의 통제에 대응할 수 없었다. 중국과 조선 모두 외부에서 그들의 경제를 통제하고 영토를 점령하는 것을 예방하는 방법이 없었다.

영국은 극동지역에서 교역을 하는데 있어 조선을 중요한 존재로 본 적이 없다. 미국의 선교사들만이 중국이나 조선에서 자신들이 해야 하는 역할이 크다고 믿었을 뿐이다. 사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쿠바,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남미 등에서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이 한국사회를 문명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봤다.

/홍현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