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한국전쟁'을 다룬 그의 책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서 지도를 25장 그려 넣고 있는데, 첫 번째 것과 마지막 25번째 것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1950년 5월의 한반도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1953년 7월 27일 휴전 후의 한반도 모습이다. 언뜻 보면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비슷하다. 38선 아래위에 동서로 그어진 군사분계선(DMZ)과 그 가운데의 삼각점이 추가됐을 뿐이다.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 핼버스탬은 삼각점으로 표시한 '폭 찹 힐'(Pork Chop Hill) 전투에 주목한다. 휴전협상 막판, 미군 포병대가 하루에만 7만7천여 발의 대포를 발사하면서 세계대전 사상 어느 전투보다도 치열한 포격전을 펼쳤던 곳. 미군과 중공군 사이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왔으면서도 아무도 차지하지 못한 곳. 바로 이 폭 찹 힐이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전투라고 핼버스탬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한국전쟁의 상징도시는 어디일까. 단연 인천일 것이다. 유엔군이 한국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바꾼 곳이며, 휴전 이후 현재까지 잇따르는 '서해교전'은 한국전쟁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실감나게 하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을 종합해보면,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는 사망자만 2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핼버스탬은 미군 당국의 자료 등을 토대로 공식 집계된 것만 한국군 전사자 41만5천 명, 부상자 42만9천 명, 미군 전사자 3만3천 명, 부상자 10만5천 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북한과 중공군의 전사자는 1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전쟁 기간에 학살당한 민간인도 4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해방, 그리고 분단
세계 20개국이 참전해 수백만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고, 그 피해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한국전쟁은 1945년 찾아 온 해방과 함께 그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반도에는 해방과 동시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이른바 군정(軍政)이 시작됐다. 이들은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나오기도 전에, 남과 북을 갈라 '통치'하기 시작했다.
해방을 맞았으나, 1919년 이래 우리민족을 대표해 온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는 입국조차 하지 못했다. 해방 3개월이 지나서야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그룹을 나누어 귀국해야 했다. 한반도에서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해 온 각 파벌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온 그룹이 리더들의 친소관계에 따라, 이념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여기에는 미국과 소련의 정치공작이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좌우 대립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다. 여러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통합노력도 치열하게 전개됐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로 결집해 친일세력과 외세를 견제하는 체제부터 세워야 했으나, 오히려 분열되고 만 것이다.
남한에선 특히 미, 영, 중, 소 등 4개국에 의한 5년 기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찬탁파'와 반대하는 '반탁파'로 갈라져 치열한 싸움을 했다. 1947년 남대문 부근에서 있었던 광복 기념 경축행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 1장은 당시 상황을 너무나 잘 대변해 준다. 좌익과 우익이 서울운동장과 남산에서 각각 따로 광복 기념행사를 갖고 남대문 부근에서 만났는데, 여기서도 대로변을 양쪽으로 갈라서 따로 집회를 가진 것이다. 당시 좌우익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가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8년에 남과 북은 각기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2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해방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서울에서 빚어진 웃지 못할 해프닝에서 이미 분단은 예견됐는지도 모른다. 해방이 되기 전부터 국내에서 '건국준비'에 여념이 없던 몽양 여운형(1886~1947)이 이날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천 명의 인파에서 격려 연설을 했다. 끝 무렵에 어떤 이가 군중 속에 뛰어들며, "지금 남대문 역에 소련군이 도착했다"고 외쳤고, 이로 인해 연설회장은 일대 혼란이 야기됐다고 한다. '여운형 평전'을 쓴 이기형은 몽양의 연설을 중단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이런 소문에 의해 그날 서울은 소련군 환영 시가행렬로 한바탕 소란을 겪었다고 한다. 소련군을 맞으러 나가려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해방 직후 한반도 상황이 어땠는지는 '해방 직후는 문자 그대로 혼란 복잡하였다. 봉건유습으로 계층이 대립되고, 일제의 잔재로 노동자와 자본가가 싸우고, 38도선으로 남북 정세가 다르고, 국제 조류로 사상이 갈린 이때에 …'라고 한 이기형의 말('여운형 평전')에 적확하게 응축돼 있다고 하겠다.
여운형은 일제의 항복 직전인 1944년부터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했다. 해방 당일에 '건준'이 공식화 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여운형은 9월 초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하면서 '건준'을 해체한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좌우의 협공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좌우 합작'에 누구보다 혼신을 다해 노력했던 여운형이 해방 직후부터 여러 차례의 테러 끝에 결국 1947년 피격 사망한 것은 국가적 불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운형의 죽음을 놓고 박태균 교수는 "좌우합작운동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사회 지도자는 중요한 시기에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한 개인이 아니라 공인이기 때문이다. 좌우합작운동을 실패에 이르게 한 것은 바로 여운형이라는 한 지도자의 죽음이었다"고 평가한다.
여운형의 피격 이후 1948년 남북은 각기 정부를 수립했으며, 그 이듬해에 백범 김구가 암살당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한국전쟁이 터졌다.
많은 전문가들은 결과적으로 신탁통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이 전쟁을 불러온 주요 원인이라고 꼽고 있기도 하다.
■ 해방공간과 인천
인천에서는 '해방천하'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막힌 일도 벌어졌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 부근에서 미군환영행사가 벌어졌는데, 대열에 있던 권평근(1900~1945)이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미군은 '치안유지' 명목을 내세워 일본 경찰을 동원했고, 일본 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했던 것이다.
권평근은 인천지역 항일운동과 노동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해방이 됐는데도 항일운동가가 일본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으나, 미군은 그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하고 말았다. 당시 미군정의 친일적 시각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 사흘 뒤인 9월 11일자 미국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우리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시행한 쓰레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우리가 해방시킨 민중들에게는 강경하게 대해야 하는가…'라고 당시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잘못된 태도를 꼬집었다고 한다.

인천에 상륙하기 전 미군은 이미 덕적도 해상에 정박해 있을 때 여운형이 보낸 사람들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 측은 이때 여운영 측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일본 측을 더 믿었으니 말이다.
인천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일제가 2차대전 말기 군수시설을 인천에 밀집시키면서 각종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부평의 육군조병창과 잠수함까지 건조할 수 있는 동구의 인천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자리)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 금속 분야뿐만 아니라 목재나 방직공장도 많았다. 미군 상륙 당시 일경에 피격돼 숨진 권평근도 인천 노동운동의 핵심이었다. 노동운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해방공간에서 인천은 이데올로기의 집적 장소로도 기능했다. 좌우익의 대립도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특히나 1945년 9월 8일의 미군 '인천상륙'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두 번째 한반도 상륙이었다. 신미양요는 '침략'이었고, 이번에는 '구원'이 명분이었다. 미군은 다시 5년 뒤 '구세주'가 돼 연합군을 이끌고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펼쳤다.
■ 전쟁 직전의 국제정세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크고작은 규모의 남북간 전투는 자주 있었다. 1949년 8월의 옹진반도 전투는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 한다. 북한은 1946년부터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훈련하는 등 군인들이 전쟁 준비에 나섰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데 당시 남한은 파업과 테러, 폭동이 그치지 않았다. 남과 북의 모습이 상반되는 것이다.
이는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은 북한지역에서 자연스러운 '공산화'가 진행되도록 하는 차원에서 여러 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에 소련군이 먼저 철군한 것도 이런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책에 큰 변동도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은 오락가락했다. 미국은 남한에 진주한 뒤로 재정적 지원도 인색했으며, 여러 단체들을 제대로 컨트롤하지도 못했다. 특히 친일세력에 의존하기까지 했다. 또한 항복한 일본을 '무장해제'한다는 정책에서 '재무장'과 '경제복구' 쪽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1947년부터다. 이는 '미국의 서해안은 아시아의 동해안인 일본이다'는 맥아더의 인식과 맞물려 있다. 미국이 한반도보다는 일본에 무게 중심을 두게 됐다는 얘기다.
중국에서는 1947년부터 공산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미국의 '공산화 봉쇄정책'을 강화하는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소련은 미국의 예상보다 빠른 1949년 9월에 원자탄을 개발했다. 미국은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을 밀다가 패배한 셈이 됐고, 소련이 원자탄까지 소유하게 되면서 군사력 비교에서도 미국이 앞설 수 없게 됐다.
미국은 전쟁이 터지기 6개월 전에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남한을 제외한다'고 선언했다.
핼버스탬은 이를 '엄청난 실수'라고 지적하고 있다. 3년 동안 이어진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은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다.
/정진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