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작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한 땅의 90%를 순식간에 점령당해 벼랑 끝에 몰렸던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수복에 성공,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 앞바다를 통해 상륙하겠다는 작전은 매우 대담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북한과 중국에 누출돼 서울 수복까지 상당 기간이 걸린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상륙지점은 인천!'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33분. 미 제5연대 3대대 해병들이 인천 월미도(그린비치)에 상륙했다. 이들이 상륙하기 전, 이미 월미도는 불타고 있었다. 북한군의 진지·엄폐물·은폐물을 파괴하려고, 유엔군이 며칠 전부터 전폭기와 전투함에서 막대한 양의 포탄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해병들은 북한군의 큰 저항없이 교두보 구실을 할 월미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시각은 오전 8시. 이후 해병들은 소월미도로 이동해 약 3시간 만에 적군의 저항을 제압했다.

인천의 '북서쪽 해안'(레드비치)과 '남서쪽 해안'(블루비치)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이날 오후 5시30분부터 이뤄진다. 만조를 기다린 것이다.

레드비치로 상륙한 미 제5연대 1·2대대 해병들은 공동묘지와 응봉산, 항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블루비치로 상륙한 제1연대 해병들의 임무는 수봉산을 차지해 적군이 인천으로 들어오거나 인천에서 탈출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작전 수행 과정에서 조류, 포연, 상륙작전 경험 부족, 적군의 공격 등으로 한때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레드비치 작전에 참여한 최석원(79·당시 해병대 삼등병조)씨는 "함상에서 그물망을 타고 상륙정으로 내려오는데 애로가 많았다"며 "이런 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또 "지휘관만 알았지, 대원 아무도 인천으로 가는지를 몰랐다"고 덧붙였다. 16일부터는 월미도와 내항(옐로비치) 등으로 지원부대들이 상륙했고, 인천시내에서 적군 소탕작전이 진행됐다. 18일 오전 인천시청(현 중구청 자리) 앞 광장에서는 인천시장 취임식이 열렸다. 미 해병대 스미스 소장은 손원일 제독의 추천을 받아 지명(知名) 인사인 표양문(表良文)씨를 임시시장으로 임명했다. 같은 날 아군은 김포비행장 탈환과 비행장 주변 소탕작전에 성공했다.

 
 

■ 서울을 되찾다

19일 오후 8시께 미 해병대 정찰반이 한강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40분 정도 지나 한강 행주나루에 도착했다. 이들은 밋밋한 봉우리를 정상으로 오인하거나 제한된 지역에서만 정찰활동을 벌인 뒤 "적군이 없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덕양산 일대에 진지를 구축한 북한군은 정찰반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색중대 본대는 한강 횡단중 적군의 공격을 받았고, 결국 '야간 한강 도하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적의 공격을 받으며 한강을 건넜다. 이후 미 7보병사단 등 여러 부대가 한강을 넘어 서울로 진입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역습으로 아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서울 수복의 시간이 지연된 만큼 희생자 수도 늘어났다.

아군이 서울을 수복한 것은 28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지 13일 만이었다.

■ 왜 인천이었나

미 합동전략계획단은 9월 실시할 상륙작전 대상지로 여러 곳을 검토했다. 당시 상륙작전 후보지는 인천, 군산, 주문진이었다. 상륙지를 아산만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고집했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 제한된 시간에만 상륙이 가능한 단점을 갖고 있었다. 인천이 상륙지로 확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천상륙작전의 최종 목적은 '서울 수복'으로, 인천은 서울과 가까운 장점이 있다. 항만시설(인천항), 항공시설(김포비행장), 이동수단(경인전철) 확보에도 용이했다. 또한 낙동강 전선에 집중돼 있는 북한군의 퇴로이자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인천이 군사상 요충지라는 점은 한국전쟁 이전의 전쟁에서도 입증됐다. 일본군은 청일전쟁(1894~1895년)과 러일전쟁(1904~1905년) 당시 각각 인천 제물포항으로 상륙, 서울을 점령했다.

▲ 인천상륙작전 전개 과정을 볼 수 있는 그래픽. 레드비치는 동구 만석동, 블루비치는 남구 용현5동 부근이다. /출처:고든 L. 리트먼이 쓴 '인천 1950'

■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평가는

인천상륙작전은 극적이면서도 성공한 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맥아더 장군이 조수 간만의 차 등 인천 앞바다의 장애를 극복하고 인천상륙에 성공한 점은 높게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서울 수복까지 13일이나 걸려 북한군이 그 이후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그의 책 '한국 1950년 전쟁과 평화'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북한과 중국이 상륙작전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군이 유엔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린 점, 북한군이 막강한 유엔군에 맞서 13일 동안 버틴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많은 사람들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최초 입안한 사람은 미 국방부 소속 참모인 도널드 맥비 커티스이다.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책 '인천 1950'의 저자 고든 L. 리트먼은 "커티스는 우연히도 북한이 남침하기 며칠 전인 6월19일 우발계획 SL-17(낙동강 유역에 방어전선을 구축한 뒤 적의 측면을 우회하는 상륙작전)을 작성했다"며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나자, 맥아더의 총사령부는 그 계획의 사본을 국방부에 요청했다"고 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란 '성취감'에 취해 있던 맥아더가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 가능성을 간과한 점도 한국전쟁 최대 실수 중 하나로 꼽힌다. 맥아더가 성급하게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추진해 '1·4후퇴'를 맞았다는 것이다.

/목동훈기자

※ 한국전쟁 전문가가 본 인천상륙작전

공군 화력지원 작전성공 불구… 폭격으로 항만 기반시설 붕괴

한국전쟁 연구자인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사진)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공군의 화력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며 "공군이 먼저 월미도를 초토화시킨 뒤 해군의 함포사격 지원과 함께 상륙작전이 펼쳐졌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박 교수는 "인천상륙작전은 육·해·공 입체 작전이었다"며 "그동안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상륙부대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등 당시 공군의 역할이 컸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 박 교수는 "중국이 인천상륙작전 가능성을 경고한 뒤 김일성은 병력을 배치해 저항했지만 끝내 실패했다"면서 "공군의 무차별 폭격 등 유엔군의 화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북한 입장에서 낙동강 전선이 밀리면 끝이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막을 주력 병력을 빼 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며 "비록 인천상륙작전을 막지 못했지만, 중부 전선의 병력을 후퇴시키는 시간을 벌어 북한은 스스로 잘 방어했던 전투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역은 그야말로 폐허가 됐고, 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박 교수는 "인천만 해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냐"면서 "개항장 인천은 국제적인 무역 상업의 중심지로, 식민지 시기 갖춘 산업 기반 역시 전쟁으로 한순간에 다 파괴되고 말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평소 "한국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역설한다. 그는 "정전협정 당시 서해와 동해의 군사분계선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아 서해교전과 같은 남북 간 무력 충돌이 계속 빚어지고 있다"며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을 보면, 특히 인천은 여전히 분쟁지역에 놓여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인터뷰 내내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인천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천은 한국전쟁 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역사·문화의 도시다"며 "인천을 역사·문화의 도시, 더 나아가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로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임승재기자

※ 미국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美 국방부지원 다양한 영화 제작… 참전군인 수기·분석도서 출간도

인천상륙작전은 훗날 영화, 음악, 책 등으로 탄생해 대중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81년, 5천만달러 가까운 거액을 들여 미국에서 만든 영화 '인천(Inchon)'이다. 화려한 제작진에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고도 흥행에는 참패했다.

007시리즈로 유명한 테렌스 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영국의 명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맥아더 장군 역을 맡았다. 올리비에는 출연료로 100만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 영화에는 미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현역 군인 1천500여명이 엑스트라로 참여했다. 통일교가 영화제작비를 지원하면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결국 당시 언론은 사상 최악의 영화로 '인천'을 꼽았다.

▲ 인천상륙작전의 드러나지 않은 세밀한 부분까지 다룬 책 'The Secrets of Inchon(인천의 비밀)'.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나오지 않았다.

1952년 개봉한 조셉 루이스(Joseph H. Lewis) 감독의 영화 '후퇴란 없다!(Retreat, Hell!)'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중국군에 밀려 흥남 철수를 감행하기까지 미 해병대의 모습을 94분 동안 그렸다.

음악도 있다. 합주곡 '인천(Incheon)'은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황을 음악으로 담아낸 명곡으로 꼽힌다. 로버트 스미스(Robert W. Smith)가 작곡, 플루트 독주로 시작하는 이 곡은 퍼커션 사운드로 포격소리와 헬리콥터를 표현해 직접 전쟁 현장에 있는듯한 생동감 넘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작곡가 스미스의 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책으로는 'The Secrets of Inchon(인천의 비밀)'이 있다.

미 극동군 사령부 첩보부 소속으로 상륙작전 전 첩보수집 임무를 담당한 유진 클라크(Eugene Franklin Clark) 대위의 수기인 이 책에는 상륙작전 당시 첩보수집 활동을 벌였던 부대의 활약상이 담겨있다. 그는 상륙작전 당일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히게 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등 당시의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의 책을 보면 그와 함께 작전을 수행한 연정, 계인주 등 군인과 덕적도, 영흥도 등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의 모습도 생생히 만나볼 수 있다. 클라크 대위는 1966년 중령으로 퇴역한 뒤 1998년 별세했다. 그의 수기는 수십 년간 다락방에 보관되어 오다가 사후에 유족이 발견해 2002년에야 출판됐다. 이 책은 아직 국내에서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밖에 고든 L. 리트먼이 쓴 '인천 1950'(플래닛미디어), 'FOG OF WAR:인천상륙작전 VS 중공군'(조상근, 집문당) 등의 책이 있다.

/홍현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