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 입성한 미군 병사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기대감에 부풀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더욱 기세등등했다. 중공군 참전을 우려하는 워싱턴 수뇌부의 경고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최고 사령관 맥아더에겐 곧 끝날 전쟁이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넘은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은 이미 '운산' 일대에 매복해 있었다. 평양을 출발한 미군 병사들은 앞으로 어떠한 비극이 불어닥칠지 모른 채 다음 작전지역인 운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무나 쉽게 북한군에 밀려 국토의 90%를 내줬던 국군과 미군이 이번엔 거꾸로 너무나 쉽게 압록강 일대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어처구니없는 '몰살'을 당했다. 미군이 중심이 된 아군이 중공군의 '전술'에 속아 평양 진격 이후 너무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다. 전쟁발발 5개월 만에 뺏기고, 빼앗고, 다시 빼앗기고 하는 공방전이 숨가쁘게 펼쳐졌다.
■ 전쟁이 시작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포성이 울려 퍼졌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었다. 소련제 전차와 자주포로 무장한 북한군은 국군의 38선 일대 주요 방어선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며 '속전속결'로 남하했다.
전쟁 발발 소식에 남한 전역은 충격과 공포로 휩싸였다. 특히 38선에 인접한 수도 '서울'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퇴각하던 국군은 정릉, 미아리, 청량리를 잇는 서울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서울은 결국 북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국군은 28일 새벽 한강 교량들을 폭파한다. 북한군의 한강 이남 진출을 막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미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다. 서울에 남은 시민들은 그렇게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 유엔군 참전과 '낙동강 방어선'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도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한국전쟁 발발은 한반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든든한 우방국이었다. 자칫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었다. 확전을 우려한 백악관 참모회의에선 미군의 개입과 참전 방식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초 유엔군사령부를 설치,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를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개전 초기 북한군 전력을 과소평가했다. 소규모 미 육군 병력으로 북한군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북한군은 한강방어선을 무너뜨린 뒤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진군했다. 한반도에 상륙한 미 육군 제24사단은 천안에 방어진지를 세우고, 평택~안성을 잇는 서부전선을, 그리고 국군은 중·동부전선을 맡았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아군은 지원 병력이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며,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를 거듭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곳에서 마지막 결사항전을 펼쳤고, 북한군도 모든 전력을 쏟아부었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8월 초부터 인천상륙작전 직전인 9월 중순까지 '다부동 전투', '창녕·영산전투', '영천전투'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숱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 유엔군의 반격, 그리고 중공군의 개입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바꾼다. 국군과 유엔군이 대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다. 국군 해병대가 배속된 미 제1해병사단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했고, 미 제7보병사단은 북한군의 퇴로를 막으면서 낙동강전선을 돌파해 올라오는 미 제8군을 지원했다.
서울을 수복한 뒤 남은 과제는 38선을 넘어 북진하느냐, 아니면 멈추느냐였다. 미 행정부 내에서는 38선을 넘을 경우 북한의 우방국인 소련과 중공의 개입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실제로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남북 통일의 기회로 여겼던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을 주장했다. 맥아더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권삼 연구원은 "맥아더는 중국이 국공 내전을 치른 뒤여서 군사력이 취약하고 소련의 공군 지원없이는 섣불리 전쟁에 뛰어들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국군과 유엔군 소속의 각 부대들은 서로 경쟁을 벌이듯 북한의 수도 '평양'을 향해 앞다퉈 진격했다. 맥아더는 전쟁을 조기에 끝내 자국의 병사들을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안에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한반도에 투입한 병력 일부를 다른 지역으로 보낼 생각까지 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한 뒤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그 무렵 중공군도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30만 대군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강인한 정신력과 국공 내전을 치르며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은 최정예 부대였다.
중공군 참전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뒤바뀐다. 중공군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적의 빈틈을 노려 기습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폈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원산 등 주요 전선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특히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계곡을 따라 강계 방면으로 향하던 중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은 뒤 간신히 철수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가 벌어진 계곡을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전군을 38선 남쪽으로 철수시킨다. 중공군은 평양을 점령한 뒤 12월 중순 38선까지 남하했다. 유엔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을 적에게 다시 내줘야 했다.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제주도에 대한민국 망명 정부를 세우는 방안과 함께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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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 발발 1년이 지날 무렵 전선은 38선 일대에서 교착상태에 빠져든다. 확전을 고집하던 맥아더가 항명을 이유로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고, 이어 4~5월 두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뒤였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그러나 휴전협상은 군사분계선 설정, 전쟁포로 처리 등의 이견으로 1953년 7월 27일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2년간 지속된다. 그 사이 양측은 협상과정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전투를 멈추지 않는다. 포로 문제로 촉발된 강원도 철원군 일대의 '백마고지 전투'가 대표적인 예다.
미 제7보병사단의 한 자동화기 소대 부소대장이었던 데이비드 키페(82)씨는 당시 북한군 첩자 활동에 관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1952년 봄 어느 날 적군의 120㎜포가 우리 진지 쪽에 매우 정확하게 떨어진 적이 있었다"며 "부대에서 요리와 빨래를 해 주고 가끔은 우리의 놀림감이 되곤 했던 한국인 '하우스보이'들이 첩자였던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남·북한은 휴전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지도자들의 잘못된 상황 인식과 판단 때문이었다"며 "소기의 목적인 통일조차 이루지 못하고, 남북한 양측에 엄청난 피해만 불러왔을 뿐이다"고 지적했다.
/임승재·홍현기기자
※ 눈부신 활약 펼친 한국軍
완전편제 못갖춘 미군 지원… 주요작전 투입돼 임무 완수
한국전쟁에서 UN군 못지않게 한국군의 활약도 컸다. 한국군은 영흥도 첩보전과 인천상륙작전 등에 투입돼 임무를 완수하는 성과를 거뒀다.
한국 해군은 1950년 8월 18일과 20일 각각 인천 덕적도, 영흥도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을 위해서였다. 덕적도 상륙작전은 수월하게 진행됐지만 영흥도에서는 적군의 저항이 거셌다. 이 때문에 한국 해군은 23일 영흥도 확보에 성공하기까지 여러 명의 병사를 잃어야 했다.
해군 첩보부대는 월미도 등 서해안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 과정에서 적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한국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여했다. 인천에 상륙한 해병대는 시가전이 주 임무였다. 또 김포지역 방어 임무를 맡아 김포비행장을 공격하려는 적군과 싸워 이겼으며, 한강을 넘어 서울 수복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한국 육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하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싸웠다. 또 낙동강 방어전선과 수도권 등을 오가며 적군을 소탕하고 미군을 지원했다.
군사 전문가인 남도현씨는 '끝나지 않은 전쟁 6·25'에서 "미국은 완전편제도 갖추지 못하고 6·25전쟁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남씨는 또 "이 때문에 부족한 병력을 메우고자 미 해병 1사단에는 국군 해병 제1연대가, 미 제7사단에는 국군 제17연대가 예하 부대로 참여하게 됐다"며 "국군도 인천상륙작전에 당당히 주역으로 이름을 올려놓게 된다"고 했다.
1·4후퇴 이후 한국군은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1951년 2월 10일 오후 6시께 한국군은 유엔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인천에 상륙, 해안가 부두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이날 오후 9시와 11시 각각 기상대고지, 시청(현 중구청 자리)을 점령한다.
/목동훈기자

※ 치열한 교전 벌어졌던 '부평전투'
美해병대, 원통이고개 매복… 北전차부대 기급공격 '대승'
인천시 부평구 일대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이름하여 '부평전투'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미 해병 제1사단은 김포비행장과 영등포를 교두보로 삼아 서울을 수복할 계획이었다. 부평은 미 해병대가 서울로 향하는 주요 진격로였다. 미 해병대는 지금의 인천 지하철 동수역와 부평삼거리역 일대인 '원통이고개'에 전투 병력을 분산 배치한다. 북한군의 반격 징후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7일 오전 5시45분께 경인국도를 통해 인천으로 들어오던 북한군 전차부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미 해병은 북한군이 원통이고개로 완전히 들어서기를 기다렸다가 대전차 화기로 일제히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원통이고개 전투에서 사살된 북한군 병력은 200명에 달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경인전철을 따라 작전을 전개한 한국 해병대 제3대대도 부평역 일대에서 언덕에 숨어 있던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후 김포비행장으로 향하는 미 해병 제1사단 5연대가 부평을 빠져나갈 때까지 부평역과 시가지에 남아 북한군 소탕 작전을 폈다. 한국 해병대 제3대대는 작전을 마무리한 뒤 계양구 효성동을 거쳐 계양산을 점령한 뒤 박촌으로 진군했다.
이 밖에 부개동과 송내동 일대에서는 서울로 진격해 올라가는 미 해병과 이를 저지하려는 북한군 사이에 한바탕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임승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