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에 참석했었다는 전 북한 요인 강상호(姜尙昊)씨는 1990년, NHK가 한국전쟁 40주년 특별프로그램으로 제작한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밝혔다. 강씨는 이 자리에 참석하기 전날까지도 전쟁이 언제 일어나는지 몰랐다고 했다. 강씨는 전쟁 직후 소련으로 망명했다. NHK 취재팀은 이 프로그램을 위해 러시아 현지로 가서 강씨를 인터뷰했다. NHK의 이 특별프로그램은 방영 이듬해인 1991년 '한국전쟁'이란 제목의 책(동아출판사)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3년 동안 좁디좁은 한반도에 세계 20개국이 뒤엉켜 200만명가량을 죽게 한 사상 최악 전쟁, 한국전쟁은 이렇게 '김일성 사무실'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남한의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는 논리를 여전히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북한 주장은 설자리가 많지 않다. 러시아나 중국에서도 그렇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이고, 그 참화를 키운 사람은 또 누구인가. 한국전쟁의 상징도시 인천의 '인물'들은 그 시기 무엇을 했는가.
■ 전쟁을 부른 사람들
한국전쟁의 제1 책임은 김일성에게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김일성이 지휘하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뒤에서 받쳤다.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까지도 중국보다는 소련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1950년 4월과 5월에 소련과 중국을 각각 방문해 전쟁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소련과 중국의 입장에 차이가 있었다. 소련은 자국의 '위성국가'로 전락한 북한에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했고, 마오쩌둥은 미국의 참전을 우려했다.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뒤인 1945년 10월에야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 이전까지 김일성은 북한 사회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택한 이유는 정치적 역량이나 지도력이 부족해 소련의 입맛에 맞게 움직여줄 대상이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당시 공산사회에서 김일성의 정통성은 마오쩌둥은 물론이고 베트남의 호찌민에게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소련의 선택을 받은 김일성은 인민군이 38선을 넘고 이틀이 지난 6월 27일까지 중국 당국에 공격을 개시했다는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또 마오쩌둥의 여러 가지 전법 조언도 듣지 않았다. 김일성이 중국을 무시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세 나라 사이의 신뢰가 전쟁 초기에는 그리 높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승만도 전쟁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도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이승만은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키웠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는 미국의 견제 대상으로 꼽혔다. 역사의 기막힌 아이러니는 여기서도 등장한다. 마오쩌둥에게 대만으로 밀려난 장제스가 이승만을 맥아더에게 추천했고, 이게 인연이 돼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과 맥아더는 '한맘 한뜻'이 돼 움직였다. 이승만은 '리틀 장제스'로까지 불렸다. 장제스를 축출한 마오는 장제스와 가장 가까웠던 두 인물, 이승만과 맥아더에 의해 아들을 전장에서 빼앗겼다. 인천상륙작전에 승리한 맥아더의 북진으로 마오쩌둥은 아들을 잃은 것이다. 마오쩌둥의 아들(毛岸英)은 펑더화이(彭德懷) 총사령관의 참모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종군하고 있었는데, 1950년 11월 20일 유엔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트루먼 등 미국 당국자들도 한국전쟁에 일정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콜디스트 윈터-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쓴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남한을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선언'이 전쟁의 기폭제가 됐다고 보고 있다. '애치슨 선언'이 김일성과 소련으로 하여금 남침을 해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다는 것이다.
■ 전쟁을 키운 사람들
북한의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이 한국전쟁 발발의 세 주역이라면, 맥아더와 이승만도 전쟁 전개 과정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피해를 키운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전쟁 중에 얼마나 잘못 행동했는지는 1952년의 '가짜 공비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국회가 이승만 권력독점에 반발해 정치개혁을 단행하려 하자 이승만은 '가짜 공비 사건'을 만들어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선의 군인들을 부산으로 불러 국회를 마비시켰던 것이다. 이런 이승만은 이후 미국의 '제거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승만과 미국의 관계가 비정상이었듯, 한국 전쟁 초반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태평양 총사령관 맥아더의 관계도 정상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전쟁 경험이 풍부한 장교는 당연히 맥아더였다. 1차세계대전 때부터 전장을 누볐다. 이런 맥아더가 한국전쟁을 낙관했다. 또 정보를 왜곡시켰다. 대통령 출마에 더욱 관심이 컸다. 맥아더는 중공군 참전 직전인 10월 22일, 탄약을 대량 적재한 함선 6척을 한국에서 하와이로 뺐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평양진격 등의 흐름으로 볼 때 '전쟁은 끝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맥아더는 또 국경지대에는 한국만 파견하라는 트루먼의 지시를 묵살하고, 10월 24일 모든 유엔군에 압록강까지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최고 지휘관의 오만과 오판이 빚은 참극은 여기서 시작한다. 중공군이 참전해 다시 서울을 빼앗겨야 했고, 전쟁은 3년을 끌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미 전쟁 발발 전부터 정보당국의 '남침 정보'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맥아더는 전쟁이 터진 다음 날인 26일 저녁에도 도쿄에서 미국 공화당 인사인 덜레스 부부와 만찬을 하고 영화구경까지 했다고 한다. 중공군 참전 과정 등에서 트루먼과 갈등하던 맥아더는 결국 본국으로 소환돼 군복을 벗었다. 맥아더를 통제하지 못했던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의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맥아더 역시 대통령을 제대로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그동안 쌓아온 위상에 치명타를 입었다.
■ 전쟁과 인천 인물
인천대학교와 선인고등학교 등으로 대표되는 인천의 최대 사학(私學)으로 '선인재단'이 있었다. 그 '선인'이란 두 글자는 한국전쟁의 두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백선엽 장군과 그의 동생 백인엽 장군의 이름에서 시작한다. 선인학원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인천시와 교육청에 그 재산을 넘겨야 했다. 공립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형 백선엽은 허종이 쓴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란 책에 따르면, 미군정기 조선경비대 정보국에 근무했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근무했다. 일제가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조직한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제1사단장을 맡았던 백선엽은 미군들이 가장 훌륭한 한국군 지휘관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백선엽이 중공군의 참전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적절히 대응해 병사들을 구한 점을 미군들이 높이 평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군이 되어 만주에서 활약한 때문이었을까. 백선엽은 직접 중공군 포로를 신문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통했던 모양이다. 그 결과 보고를 올렸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믿지 않고 부정했다고 한다.
백인엽도 전쟁 직전 옹진반도를 지키던 수도사단 제17연대 연대장으로 있었다. 전쟁이 터질 때 38선의 모든 부대가 주말휴가로 텅 비다시피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백인엽 부대는 전원이 경계근무 중이었다고 한다. 백인엽은 "수일 전부터 전선 상황이 매우 수상해, 병사들을 휴가 보내지 않았다"고 NHK '한국전쟁' 제작팀에 말했다. 또 NHK가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백선엽이 맡은 제1사단은 서울 북쪽 38선을 따라 배치돼 있었는데, 백선엽은 전쟁 전날 밤에 토요일 댄스파티에 참가하느라 서울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후 백선엽, 백인엽 형제는 한국전쟁에서 한국군으로서는 최대의 활약을 펼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 형제의 인생도 곡절 많은 한국 현대사의 단면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해방 직후부터 남북으로 분단돼 '세계의 전쟁'을 치른 한반도의 운명처럼, 인천 출신으로 일제시기에 좌익계열에서 함께 활동하다 해방 이후 결별한 뒤 남북으로 나뉘었으며 결국엔 한국전쟁이 발단이 돼 목숨을 잃은 두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조봉암과 이승엽이다. 인천은 해방 직후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진영의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우익진영의 기업주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좌우의 도가니'였던 셈이다. '해방정국 청년운동사'(김행선 저)는 '조선인민보' 1945년 12월 17일자를 인용해 '당시 인천지역은 제2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세력의 아성이었다. 인천은 항구도시이며, 공업도시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선원과 근로자들이 많았고, 공산당의 이승엽, 조봉암 등의 연고지였다'고 설명한다.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노동당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던 이승엽은 1948년 7월 월북했으며, 전쟁 중에 김일성 계열로부터 박헌영과 함께 숙청됐다. 이승엽은 박헌영의 오른팔로 통했는데, 전쟁 직전인 1950년 1월에 '조국통일을 위한 남반부 인민 유격투쟁'이란 보고서를 통해 남한에서의 농민 봉기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했다고 한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남한에서의 '호응'이 없었고, 따라서 김일성의 계획대로 전쟁이 진행되지 않았다. 남로당 숙청은 '전쟁 책임론'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봉암은 좌익의 핵심 인물로서 해방과 동시에 인천에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듬해에는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이승만 정권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조봉암은 국회 부의장 선출 1주일 만에 전쟁을 맞았다. 특히 1952년 8월 부산에서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해 이승만과 맞붙었다. 이것이 이승만의 정적이 돼 올가미를 쓰게 된 원인이다. 조봉암은 1956년에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해 '선거에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 속에서 낙선했다. 결국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간첩 누명을 쓰고 1959년 7월 31일 사형당했다.
/정진오기자
※ 당시 해군첩보부대 상륙작전 지휘한 함명수 제독
北전투중 부대원 비밀유지 위해 자결
'숨진 부하 넋 위로' 매년 영흥도 찾아
인천상륙작전 과정에서 한국군으로 유일하게 사상자가 난 부대가 있다. 해군첩보부대다. 함명수 소령, 김순기 중위, 임병래 소위 등 17명으로 구성된 첩보대는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만들어져 인천 등지에서 첩보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상륙작전 하루 전, 잔무 처리를 위해 영흥도에 남아있던 임병래 소위, 홍시욱 대원 등이 인민군과 전투중 비밀 유지를 위해 자결했다. 당시 소령으로 첩보부대장을 맡았던 함명수 제독은 이때 숨진 부하를 기리기 위해 매년 영흥도를 찾는다고 했다.
해군첩보부대는 인천상륙작전까지 채 한 달이 남지않은 8월 24일 새벽 영흥도 남단 십리포 해안에 닻을 내렸다. 영흥초등학교에 숙소를 꾸린 이들은 송도 해안으로 건너가 김순기 중위가 인천경비부에 근무할 때 지하조직원으로 활용했던 권씨라는 사람을 찾아갔다. 함 제독은 "영흥도는 서울시 인민위원장으로 있던 이승엽의 고향이라 걱정이 컸다"고 했다.
권씨는 보안서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권씨와 또다른 조력자 김씨의 도움으로 인천 내륙에 거점을 마련하고 통행증을 구할 수 있었다. 월미도의 무장 현황에 대한 정보를 얻을 때는 직접 인부로 일하기도 했다. '월미도 해안에는 4문의 고사포와 400여명의 병력이 있다'는 등의 첩보가 사령부로 보고됐다.
함 제독은 "9월 1일 미 해군 클라크 대위 일행이 영흥도에 도착한 뒤부터는 그가 직접 맥아더사령부로 첩보를 보고했다"며 "클라크 대위는 이후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미 해군 십자훈장을 받았다. 첩보부대가 상륙작전에 기여한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고 했다. 미 정부는 첩보작전 중 숨진 임 소위 등에게 최고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고 한국 정부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함명수 제독은 1964년부터 66년까지 제7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홍현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