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에코뮤지엄(Ecomuseum)에 견주어지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오는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
이를 위해 경기도와 문화재청은 남한산성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우선 등재 추진 잠재 대상으로 선정, 최종 심사에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경기문화재단과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은 최근 경기도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사람, 역사, 문화가 살아있는 남한산성'에서 조선 왕들의 남한산성 행차와 관련, 역사적 기록을 처음 공개했다. 이에 경인일보는 10월 마지막 휴일인 오는 30일 오전 10시에 열리는 '남한산성 대향연(大饗宴)'을 개최한다. 연인 또는 가족들과 함께 성곽 둘레길 걷기와 판소리 명창 임진택의 '남한산성' 등 풍성한 문화공연을 즐겨보자. ┃편집자 주
조선 국왕들은 천혜의 요새로, 나라를 지켜 온 남한산성에 행차해 왔다. 이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행궁에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기 이전부터다. 숙종(1688년)을 시작으로 영조, 철종, 고종 등 모두 5명의 국왕이 200여년에 걸쳐 행차한 곳으로 유명하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대왕은 남한산성을 벤치마킹해 화성행궁을 축조했으며 선왕들이 여주 영릉(寧陵·효종릉)과 광주의 인릉(仁陵·지금의 서울 내곡동 헌·인릉) 등을 참배하는 길에 남한산성을 방문한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북벌론을 추진한 조선 국왕들은 남한산성 행차시 장대(將臺)에 올라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 나라를 수호(守護)하는 산성
조선 국왕들은 왜 다른 산성들은 제쳐둔 채 남한산성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왔을까? 남한산성은 '하늘에서 만들어 준 천혜의 요새'란 뜻의 '천작지성(天作之城)'으로, 이 나라의 중심을 수호하는 산성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으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에 위치, 삼국시대 이후 외부세력으로부터의 수도 지킴이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한강 남쪽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성벽을 구축,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을 정도의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내부는 넓고 평탄해 80여개의 우물과 45곳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水源)이 풍부하고 비축된 군량미만 충분하다면 수만명의 병력도 수용할 수 있어 전투의 최후 보루가 돼 온 것이다. 이에 남한산성에 행차, 병자호란 때 사망한 사람들의 충절을 기리고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하는 조치를 한 국왕들이 많이 나타났던 것으로 분석된다.
# 남한산성에 행차한 조선 국왕들
조선 국왕들은 200여년에 걸쳐 남한산성에 행차해 왔다. 조선 후기 국왕들이 남한산성에 행차한 일지 등에 따르면 숙종부터 시작된 조선 국왕들의 행차는 영조(1730년), 정조(1779년), 순조(1862년), 철종(1867년) 등에 걸쳐 200여년간 이어졌다.
4박5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된 왕 행차는 창덕궁을 출발,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광나루 북쪽 언덕과 남쪽에 있는 율목정에서 휴식을 취한 뒤 남한산성에 입성했다. 이어 여주 영릉에 제사 지내고 이천으로 돌아가거나 광주 인릉을 참배한 뒤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서장대에 오르고 마지막 날 광나루를 거쳐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효종으로부터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분명하게 드러난 숙종과 영조, 정조는 여주 영릉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한 반면, 순조의 아들이 돼 왕위를 계승한 사도세자의 친손자인 철종과 그의 증손자인 고종은 순조의 인릉을 방문했다. 고종은 한강가에 있는 용양봉저정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수상훈련을 한 것이 특징이다.
# 국왕의 행차는 '행행(行幸)'
남한산성에 행차한 국왕은 우선 온왕묘와 현절사에 관리를 파견해 제사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 순국한 유공자를 포상했다.
온왕묘는 '백제시조왕(百濟始祖王)'인 온조왕을,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三學士:오달제·윤집·홍익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국왕들은 병자호란 때 순국한 유공자에게 제사지내고 그 후손들을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고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함께 항전한 사람들을 우대하기도 했다.
조선후기 국왕들이 온왕묘와 현절사, 병자호란 때 순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그들의 후손을 관리로 등용한 것은 국가에서 그들의 희생을 잘 기억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또 현지 유생과 무사를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시행했다. 정조만이 유일하게 남한산성 연병관에 직접 나가 문과뿐만 아니라 무과를 동시 시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국왕들은 병자호란의 격전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의 방어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남한산성에 행차한 국왕은 항상 서장대에 올라 주변의 형세와 산성의 관리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나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은 정조로부터 시작됐다.
게다가 조선후기 국왕들은 능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인근 백성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거나 민원사항을 접수, 해결해 주기도 했다. 국왕의 행차는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조선후기 국왕들은 남한산성의 행궁, 서장대, 남장대, 남문, 북문, 연병관(연무관), 인화관, 침과정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남한산성을 방문한 국왕 행차와 그들의 발길이 미쳤던 장소와 건물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은 남한산성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상천·임명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