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봄 광주광역시로 새로운 여행 연재물 소재를 찾기 위해 무작정 떠난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오래된 벗을 만났고 그가 전해 준 한 권의 책. 책의 제목은 최인호 작가의 에세이집 '인연'이었다.

인연(因緣). 책 속에서 최인호 작가는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듯 독자들에게 자신이 살아 온 중요한 순간들을 들려 주고 있었다. 그가 들려 준 자신과 인연을 맺어 온 아름다운 순간들 중 한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페이지에는 최인호 작가가 느낀 김유정이라는 한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 최인호가 사랑한 김유정을 찾아서

김유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실레마을은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위치해 있다. 춘천 외곽에 있는 탓에 자가용을 이용해 접근하기도 편하지만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서울 상봉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경기도 동부지역의 한적한 풍광을 즐기며 달렸을 때 한국 최초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김유정역에 도착했다. 강촌역과 남춘천역 사이에 위치한 김유정역은 1939년 7월 신남역으로 영업을 시작했고 2004년 12월 1일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김유정역은 최근 신역사가 들어서 있어 깔끔한 분위기였지만 신역사 옆에는 구역사가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김유정역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김유정역을 나와서 구역사를 둘러본 후 맞은편 샛길로 들어서서 5분 정도 거닐면 김유정 생가가 나온다.

김유정 생가에는 그의 문학세계를 살펴 볼 수 있는 문학기념관이 있고 팔각정이 딸려 있는 작은 연못과 조각상, 생가가 옹기종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유정의 실레마을이 관심을 끄는 것은 꼭 기념관과 생가를 복원해서는 아니다.

마을 뒤편에 위치한 금병산 자락에 김유정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가터 앞에는 김유정이 금병의숙이라는 야학을 열기 전 움막을 짓고 야학을 하던 곳이 나온다. 현재 움막터에는 김유정과 관련한 다양한 행사를 열기 위해 옛 집을 복원하고 무대를 만들어 놨다. 생가에서 나와 이정표를 따라 거닐다 보면 한적한 농촌마을의 담장길과 팽나무가 지켜 주는 정겨운 들판길을 거닐게 된다. 여기에서 금병산 자락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울창한 침엽수가 아름다운 산길로 들어서게 되고 나무로 된 작은 안내판에 '들병이들이 넘어오던 눈웃음길'이라는 팻말이 나타난다.

이번 문학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0여분쯤 거니니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로 들어서게 되고 이후 김유정의 대표적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레마을과 관련한 장면들을 설명하는 안내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 먹은 고갯길' 등.

하지만 이런 안내판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풍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의 포근함이다. 낙엽진 길을 밟는 느낌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실레이야기 길 비탈진 길에서는 역사 주변에 자리한 마을들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이런 한적한 길을 2시간 남짓 거닐면 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 최인호가 수필을 통해 소개한 김유정과의 인연

책 속에서 최인호는 암 투병 중 가까운 지인과 함께 춘천을 다녀오던 중 '김유정 마을'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그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 김유정 생가에서 그가 본 것은 대학생 시절 자신의 감성을 자극했던 김유정의 편지였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홍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 김유정 기념 전시관

(중략)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중략)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보겠다.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최인호는 대학생 시절 이 편지를 읽고 며칠간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최인호가 '인연'이라는 수필집에서만 병마와 힘겹게 싸우던 김유정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월간 샘터에 25년여간이나 연재한 소설 '가족'의 제402회에 김유정의 편지를 인용하며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펑펑 울었다'며 병마와 싸우는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기도 했다.

/김종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