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는 강진은 현대문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영랑 김윤식(1903~1950)의 고향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영랑 김윤식은 잘 다듬어진 언어에 감각적인 문구로 순수 서정시를 개척한 인물이다.호남의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서기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한다.
일본에 나라가 넘어가는 것에 분개해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바로 다음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C.G.로세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해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하지만 혼란했던 시대에 주권을 빼앗겨 분개했던 그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완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그의 마음속에는 민족 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바로 그런 그의 마음은 다음의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문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 뿐이구려
히끝히끝 산국화 나붓기면서
가을은 애닯다 소색이느뇨
-문허진 성터(지은이:김영랑)
# 민족 애환과 문화의 자부심을 지키고 싶었던 영랑
영랑을 다시한번 떠올린 것은 단풍이 막 물들어 갈 무렵이었다.
몇년 전인가 우연히 들렀던 영랑 생가 부근에서 무너진 성터를 보며 가슴 아파했던 영랑의 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너진 성터와 단풍.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가을 정서에 맞지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런 생각에서 찾은 영랑 생가는 강진 읍내에서 멀지 않았다.
강진종합버스터미널에서 나오자마자 영랑생가 가는 이정표가 보였고 채 2㎞도 가지않아 아담한 담이 예쁜 길 끝에 단풍이 물들어가고 있는 영랑 생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영랑 생가는 영랑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영랑 생가는 이엉을 엮어 올린 초가지붕의 가옥이지만 본채와 사랑채·문간채, 다양한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는 조경이 아름다운 전통가옥이다.
영랑 생가 입구에는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가을에는 노랗게 물든 잎이 여행객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이 곳에서 영랑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제야',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다.
# 민족 문화의 자부심을 곱씹던 사의재 가는 길
영랑 생가에서 멀지않은 곳에는 사의재(四宜齋)라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와 첫 4년간 머물렀던 주막이 있다.
영랑 생가와 사의재 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 골목길이다.
가을인 탓에 길가 돌담에는 붉게 물들어가는 덩굴과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 열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또 높지 않은 담장 안을 살짝 들여다보면 촌부가 바지런히 관리한듯한 아담한 텃밭과 장독대, 그 뒤로는 먹음직스럽게 열린 감이 풍성한 감나무가 눈길을 끈다.
이런 한적한 길을 30여분간 거닐면 비로소 사의재가 나온다.
여행길에서 만난 사의재는 최근 복원한 건물이지만 작은 소품까지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다산이 지은 '사의재기(四宜齋記)'에는 당시 그가 생각했던 4가지 생각을 적고 있다.
생각은 마땅히 맑게하되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하게 하되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말이 많으면 곧바로 과묵해야 한다.
행동은 마땅히 중후하게 하며 중후하지 않으면 중후하게 하라.
다산은 사의재에서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을 집필하고 제자들을 교육했다.
일제식민지시대 유학을 다녀온 후 고향으로 낙향한 영랑은 돌담길을 따라 사의재를 향하며 아마 다산이 유배오며 아파했던 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글·사진:김종화기자
※기사 관련 동영상은 경인일보(www.kyeongin.com)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