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회의에서 미국의 남한 군사지원안에 대해 거수 표결을 하고 있다. 미국은 유엔군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출처 한국현대사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 그리고 전쟁의 주체와 성격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체결됐지만,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은 계속돼 왔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역은 한반도의 화약고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남한 사회에서조차 NLL 영토선을 둘러싸고 한 치 양보없는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경인일보는 보수와 진보 진영, 양쪽 전문가들에게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목소리를 들어봤다. 그 과정에서 A교수는 B교수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와 신문 지면에 함께 실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인터뷰 요청을 일거에 거절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A교수가 거론한 B교수는 이날 경인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A교수는 "도무지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펴고 있다"며 B교수를 비난했다. 한국전쟁과 분단 고착화,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이념 갈등…. 한국전쟁이 빚은 우리 사회의 불신과 반목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줬다.

■ 전쟁의 기원부터 논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이 무너졌다'. 소련제 전차와 자주포로 무장한 북한군이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은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학계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 내부의 갈등이 증폭된 '내전'의 성격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에서 불거진 '국제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유엔군과 북한군 대표들이 1951년 7월 16일 개성의 휴전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출처 한국전쟁, NHK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소련에 의한 북한의 일방적인 남침을 주장하는 전통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한국전쟁을 일제시기 형성된 한반도 내 계급갈등이 해방 이후 폭발한 일종의 '내전'으로 본다. 그는 특히 해방 이후 좌우 이념적 대립의 상황에서 우익의 입지를 강화하는 편향적 정책을 쓴 미국이 한국전쟁 발발과 남북 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국내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인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커밍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한국전쟁 발발 원인을 지나치게 한국사회 내부 모순에서 찾을 경우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 면죄부를 주는 것일뿐더러, 소련이 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전쟁이 왜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났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박 교수는 "전쟁을 결심한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고 마오쩌둥과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5월까지 계속된다"며 "당시 5월 말 남한에서는 총선거가 치러졌는데, 북한은 어떤 인물들이 국회에 들어오는지 결과를 지켜보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또 "1950년 남한 사회는 1년 전에 비해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미국 원조자금이 들어오는 등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며 "북한 입장에서는 여순사건과 빨치산 활동 등이 실패로 돌아간 데다, 남로당 인사들은 대부분 체포돼 더 이상 남한 자체 혁명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고, 이대로 시간을 끌다간 자칫 전쟁을 해도 남한 사람들의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마저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승만의 북진정책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으로 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고 했다.

이렇듯 한국전쟁의 기원을 둘러싼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이후 소련의 유엔 안보리 회의 불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회원이자 군사전문가인 남도현씨는 "한국전쟁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완전히 회복한 상태가 아니어서 미국과 직접 교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며 "스탈린이 소련의 안보리 불참을 직접 지시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정권 말기인 1950년에 이르러 스탈린이 단독으로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고 여지를 남겼다.

■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를 둘러싼 엇갈린 평가

한국전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은 당시 유엔군 사령관을 맡았던 맥아더 장군이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 수복에 성공한 점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데다, 간조 때 해안에는 갯벌지대가 형성돼 상륙작전이 쉽지 않은 지역이다. 맥아더는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인천상륙작전을 과감하게 실행했다.

▲ 정전협정서. 한국군 대표의 서명이 빠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을 반대했다. /출처 한국전쟁, 박태균

맥아더는 서울 수복과 함께 38선 넘어 북진(北進)을 단행했다. 여기에서부터 맥아더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북진이 불가피한 판단이었다는 의견과 잘못된 결정이라는 목소리가 있는 것이다.

인천시 중구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은 이념 갈등의 상징이 됐다.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을 전후로 진보단체와 보수단체가 동상의 '철거'와 '수호'를 주장하며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이념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남도현씨는 "맥아더가 전쟁 초반기에 많은 역할을 했다"며 "이 때문에 영웅시된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이어 "대다수 군사 전문가가 동의하는 것처럼 맥아더는 1950년 9월 15일까지만 지휘를 잘했던 인물로 보고 싶다"며 "사실 그 이후부터는 군사적으로 실책의 연속이었다"고 덧붙였다.

북진에 대해선, "중국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끝내고 건국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중국군의 대규모 개입이 힘들 것으로 본 것은 당시 시점으로 볼 때 잘못된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서울 수복 후, 38선에서 반격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며 "다만 군사적으로 너무 성급하고 잘못된 북진방법을 선택한 것은 결정적인 잘못이었다"고 강조했다.

박태균 교수는 맥아더를 부정적으로 본다. 그는 "개인적으로 맥아더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다"며 "서울 수복이 너무 늦었다. 결과적으로 중부 전선에 있는 북한군 주력 부대의 퇴로를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맥아더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선 반대한다"며 "맥아더 동상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맥아더를 어떻게 평가했는가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통일연구원 전성훈 선임연구위원은 "맥아더는 한국의 오늘이 있게 만든 은인이다"고 높게 평가했다. 그는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미국의 국익을 따지며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또 "맥아더는 군인이자 전략가로서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려고 애썼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은 훌륭한 군인이다"고 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최권삼 연구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평가가 엇갈릴 수 있지만 맥아더는 남한을 수호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싸운 군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 맥아더 동상 철거와 보존 문제가 우리 사회의 보혁 갈등으로 표출된 2007년 9월 맥아더동상 앞.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1명의 노인이 삿대질하며 반대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인천 앞바다에 그어진 북방한계선(NLL)과 정전협정 문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군사분계선 설정과 전쟁포로 처리 등의 문제로 무려 2년 동안이나 지속돼 온 휴전협상이 온갖 우여곡절 끝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을 끝내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북한은 한낱 '괴뢰' 집단에 불과했다.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그런 무리의 우두머리인 김일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정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정전협정을 수용하는 것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 과업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김일성 북한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만이 정전협정문에 서명을 했다.

한국전쟁은 정전협정 체결로 동족상잔의 깊은 상처를 남긴 채 막을 내리게 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전쟁 종결이 아닌 상호 간 군사적 행동을 멈추는 '정전'일 뿐이었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1954년 4월 26일 시작된 제네바 회담은 별다른 성과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그 결과, 한반도 평화는 정전협정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이 정전협정마저도 유명무실한 상태가 됐다. 특히 남북의 정전협정 이행을 감시하고 조정해야 할 '중립국감독위원회'와 '군사정전위원회'는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됐다.

정전협정이 무력화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도 이념과 사상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린다. 전성훈 선임연구위원은 "정전협정은 북한의 남침야욕과 군사도발에 직면해 불완전하나마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해 준 귀중한 자산이다"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협정을 무력화시키려는 북한의 대남전략이 문제다"고 지적했다. 강정구(전 동국대 교수)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공동대표는 "남북 모두 정전협정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게 사실이다"며 "정전협정으론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될 수 없는 만큼 전쟁의 완전한 종식을 선언하면서, 남북이 다시는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구조적인 조건을 만드는 평화협정 체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해 NLL 해역은 특히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한반도의 화약고가 됐다. 인천 백령도와 연평도 등 최북단 접경 지역인 서해 5도 인근 해역에서 남북한 사이에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급기야 지난해 '연평도 포격사건'까지 터지고 말았다. 북한의 민간인 거주지역을 향한 무력 도발로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북한이 주민이 거주하는 남한의 영토를 향해 포격을 가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60년 만의 일이었다.

오늘날 남북 간 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NLL 문제는 정전협정과 무관치 않다. 정전협정 체결 당시 육상과 달리 해상의 군사분계선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육지를 기준으로 한강하구를 따라 우도까지 연결하는 선을 그어 양측이 각각 관리하도록 했을 뿐이었다. 서해 5도인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는 유엔군 사령관이, 이외에 기타 모든 도서는 북한군 총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의 군사 통제 아래 두기로 합의됐으나, 현재 NLL이 그어진 해역에는 분계선을 설정하지 못했다.


지금의 NLL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해상의 군사적 충돌을 우려해 임의로 설정한 경계선이었다. 북한은 NLL을 전면 부정하고 있고, 남한은 NLL 이남을 넘는 월선 행위를 곧 영해 침범으로 간주하고 있다. NLL 영토선 문제는 남한 내에서도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다. 보수와 진보로 갈리는 이념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학계 내에서도 NLL이 '국제법적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또는 '국제법이 헌법에 우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큰 시각차를 보인다. 국제법 전문가인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는 NLL을 '국제법상 효력이 없다'고 보는 국내 법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이 교수는 "NLL은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내부 작전규칙의 일환으로 남측 해군력의 북진을 규제할 목적에서 북측에 통보조차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설정한 북방한계선이다"며 "정전협정 체결을 반대했던 이승만 박사가 당시 우세한 해군력을 앞세워 북진 공격을 감행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NLL은 정전협정에서 규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관습법적 근거도 희박하다"면서 "북한이 20년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묵시적으로 남한의 관할권을 인정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고, 이를 이유로 남한이 실효적으로 지배해 온 영토와 영해라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NLL이 역사적으로 실질적인 해상경계선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 또한 직·간접적으로 이를 인정해 왔던 점에서 국제법적 효력이 있다는 학계 견해도 만만치 않다. 북한이 1959년 발간한 조선중앙연감에 NLL을 표기한 적이 있고, 이후 1992년 남북불가침 부속합의서에 NLL을 사실상의 해상경계선으로 인정한 사례 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NLL은 북한에 양보할 수 없는 명백한 영토 개념이다"고 강조한다. 국제법 전문가인 제성호 중앙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등이 대표적인 학자로 꼽힌다. 헌법학계에서는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다"며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인식하고, NLL을 영토선 관점에서 바라보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목동훈·임승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