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는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미국, 중국 등지의 대학 교수 3명과 지난 10월, 전화·이메일·대면 등의 방식으로 각각 인터뷰를 실시했다.
■ 한국전쟁의 기원은
-캐스린 웨더스비=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일성은 소련에 의존했고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소련의 승인없이) 북한이 자체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전쟁은 여러 가지 요인들의 결합으로 일어난 것으로 봐야 한다. 소련은 (패전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재무장에 나선)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소련 입장에서는 (한국전쟁 직전에) 가장 위협을 느꼈던 존재는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오는 압력을 막기 위해 한반도가 필요했고, 소련은 한반도를 가지기 위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본다. 스탈린은 1950년 1월이 돼서야 전쟁을 승인했다. 전쟁을 승인하게 된 원인으로는 미국의 NSC68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승인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미군의 철수가 일어났고, 일본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당시 분위기가 전쟁의 원인이 됐다. 그렇지만 소련은 북에 직접적인 군사 지원은 하지 않았다. 미군의 개입을 우려한 것이다. 스탈린은 이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 세계 모든 국가가 세계2차대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세계 열강은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할 때까지 그냥 뒀다가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사실을 경험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가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됐다.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이 미국과의 전쟁을 원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나는 직접 당시 외교·정당 내부문서를 봤고, 스탈린이 극도로 미군의 참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탈린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점령해 일본에 진출한 미국의 완충지대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찰스 암스트롱=소련은 미국이 북한을 침략하면서 전쟁에 개입했다고 주장하고, 미국은 북의 침략으로 전쟁이 발발했다고 하고 있다. 북한은 여전히 '미국의 꼭두각시인 남한에서 38선을 넘어와 전쟁이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의 주장이 근거 없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외교문서를 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다. 남한과 미국을 순진무구한 피해자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전쟁에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남한에서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승만의 불법 집권으로 북한에서는 남한을 침략하지 않는다면 침략당할 것이라고 느꼈다.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했다. (그런데) 1949년 중후반 몇 가지 현상이 스탈린에게 북한의 침략이 큰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했다. 우선 8월 소련의 원자폭탄 시험이 성공리에 끝났고, 10월 중국에서는 공산주의가 승리를 거뒀다. 또한 1950년 2월 중국과 소련과의 우호협정이 맺어졌다.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이 더 이상 주둔하지 않기로 했고, 독일은 다시 무장하기 시작했다. 나토가 설립되고 미국은 서유럽에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동아시아에서 국방력은 약화됐다. 스탈린은 이런 점을 보고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전쟁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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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린 웨더스비=모든 국면이 중요하다. 미군 참전으로 북의 시도를 막을 수 있었고, 모든 국면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다른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0년 10월 북한은 중국에 병력 지원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요청은 2주가량 지연됐다. 중국 정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나왔던 것이다. 사실 중국도 전쟁에 참전하길 꺼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은 정치적인 환경 자체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 공군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85%의 영토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러시아 공군은 압록강을 넘어오지도 않았다. 전쟁의 확대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이런 일을 겪으며 스탈린을 믿지 않게 됐다.

-김동길=결정적 국면으로는 미국 참전과 중국 참전을 들 수밖에 없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미국이 참전 안했다면 한반도는 조선인민공화국이 됐을 것이고, 중국이 참전을 하지 않았다면 한반도 전체가 민주주의 국가가 됐을 것이다. 또한 중국이 참전하면서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이 됐다. 나머지 국면들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인천상륙작전은 별의미가 없다. 인천상륙작전 전부터 북한은 이미 열세에 있었다. 1950년 9월에는 이미 남한이 승기를 잡고 있었다. 그 증거로 강권 참모장이 7월에 대구에서 사망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당시 북한은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북으로 진격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렸다는 차이밖에 없다. 다만 남한 자체가 초토화되지 않은 부분은 상륙작전의 성과로 볼 수 있다. 북한군은 떠날 때 그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가는데 상륙작전으로 허겁지겁 올라가게 되면서 그러지 못했다. 휴전협정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라고 본다.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중국과 세계대전으로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휴전협정은 사실 미국이 먼저 제안했다. 사실 미국과 중국은 전쟁에서 이길 의도가 없었다. 협정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스탈린의 반대로 늦어지게 됐다. 미·중의 전쟁은 소련에 좋다고 봤던 것이다. 실제로 김일성이 스탈린에 휴전을 얘기하자 '중국이 알아서 싸우고 있으니 휴전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가 1953년 3월 15일 스탈린이 사망하고 16일 바로 소련이 휴전을 요구했다. 우리의 입장은 변했다며 미국의 조건을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찰스 암스트롱=한국전쟁에서 몇 가지 결정적인 국면이 있었다. 사실 전쟁에서는 두 번의 승리가 나왔다. 1950년 7월 북한군이 반도 대부분을 점령했을 때 한 번의 승리가, 10월 남한군·미군·유엔군이 조선인민군을 중국 국경까지 밀어냈을 때 한 번의 승리가 있었다. 전쟁을 끝나게 하고 정전이 오게 한 결정적 국면은 1950년 10월말, 11월 초에 이뤄진 중국군의 개입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개입이 오늘날 한국의 분쟁 상황을 만든 것이다. 평화상태가 아닌 휴전한 상태로 명확한 해결도 없이 전쟁이 정지됐다.
■ 인천상륙작전을 평가해 달라
-캐스린 웨더스비= 인천상륙작전은 매우 위험도가 높았지만 결과적으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전 자체의 우수성보다는 김일성의 잘못된 판단이 작전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 중국과 북한에서도 작전을 예측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낙동강에서 '조금만 더'라는 생각을 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보통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다. 당시 김일성이 그랬다고 본다. 결국엔 큰 실수를 하고 미군은 성공적으로 상륙할 수 있었다. 당시 마오쩌둥과 스탈린 모두 인천에 병력을 키울 것을 북한에 요청했다.

-찰스 암스트롱=인천상륙작전은 분명히 전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전설적으로 대담한 군 전략의 표본이 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상륙작전은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소련과 북한이 인천상륙작전을 분명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첩보원으로부터 9월15일이 되기 한참 전에 작전에 대해 예상할 수 있었다.
■ 한국전쟁은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나
-캐스린 웨더스비=한국전쟁으로 소련의 확장이 중지됐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양 진영에서 결속이 강해졌고, 군사력은 증강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소속 국가간의 강한 결속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필요할 경우에만 공격을 받으면 출격하기로 했는데 한국전쟁 이후 소속 국가가 공격을 받을 경우 의무적으로 출격하게 됐다. 또한 전쟁 이후 유럽에 대한 미국의 통제가 강화됐고, 미 해군이 타이완에 파병돼 지금의 타이완의 모습이 유지되게 됐다. 또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벌이던 전쟁에도 미국이 많은 돈과 군사를 투입해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게 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과의 동맹도 급속도로 진행됐다. 소련을 빼놓고 미국이 먼저 평화조약을 맺어 버렸다.
-김동길=중국과 소련간의 동맹은 한국전쟁 전에도 있었다. 이때부터 냉전구도는 형성되어 있었다. 전쟁은 이를 극도로 승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1950년 4월 13일 발표한 NSC68로 냉전의 세계적 구조가 확산됐다. 독재자라 하더라도 반공만 하면 독재가 가능해졌다. 장제스 등 독재자들의 정당성이 인정됐다. 하지만 이런 여파들은 꼭 한국전쟁과 연관되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미 예정된 일들이었다. 한국에 전쟁이 끼친 가장 큰 영향으로는 지금까지 군사작전지휘권을 찾아오지 못한 부분을 들 수 있다. 북한은 1953년 휴전협정으로 북한군 지휘권을 바로 찾아왔다. 1950년 12월 북한군도 중국군에 지휘부를 넘겼지만 찾아왔다.

■ 한반도는 여전히 화약고로 불린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방안이 있다면.
-캐스린 웨더스비=어려운 문제다. 이제껏 나왔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지금 북한의 문제는 시스템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도 다른 나라의 사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 그들은 혁명이 일어나면 김일성 일가가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는 것 같다. 북한 정권은 (북한) 국민들조차 믿지 않고 있다. 평화를 향해 가려면 차례차례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개성공단은 좋은 사례라고 본다. 이렇게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면 평화가 올 수 있다고 본다. 최근 러시아와 남한을 잇는 가스관이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 하나하나에서 협력관계를 맺고 이런 것들이 통일이라는 결과를 불러 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통일은 마치 날씨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예상할 수 없지만 하나하나 개별적 요소들이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면 독일과 같은 통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긍정적인 것은 북한에서 더 이상 이념을 이야기하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요소들이 하나씩 단계를 밟아갈 것이라고 본다.

-찰스 암스트롱=휴전협정은 60년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한국은 전쟁에 근접하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몇 번 나왔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11월 북한이 연평도 포격을 감행했다. 우리는 휴전협정을 대체할 수 있는 더 강화된 평화협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다.
/홍현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