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가을에 찾은 정지용 생가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국 순수 서정시를 개척한 정지용의 '향수'. '향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담고 있다. 향수는 정지용 시인이 자신이 태어났던 농가마을을 생각하며 쓴 시로 알려져 있다. 한국적인 서정문학이 자리 잡히기 전에 발표된 이 작품 속에는 공간적, 청각적, 시각적, 촉각적인 것들을 상상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그 중 '금빛 게으른 울음'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도란도란 거리는 곳'이라는 표현을 통해 고향을 그리워하던 정지용 시인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늦은 가을 정지용 시인이 자신의 시세계에서 표현했던 그리운 마을, 경북 옥천 구읍으로 여행을 떠나 본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중략)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이하 생략)

 
 
▲ 정지용 생가에는 당시 그가 이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되고 있다.

# 시간이 멈춰져 있는 듯한 아늑한 마을 '옥천'

정지용 생가를 방문하기 위해 도착한 옥천역은 한산하다 못해 조금은 허전한 느낌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보통 역사 앞은 분주한 느낌이 들지만 차량도 그리 많지 않았고 기차를 타기 위해 오가는 사람들도 분주하지 않았다.

옥천 구읍으로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도보로도 가능하다. 급한 여행이 아니라면 옥천읍내 풍경을 즐기기 위해 걸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을 추천한다. 특히 옥천읍내에는 1904년에 건립한 옥천성당이 위치해 있어 들러 보는 것도 좋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 있는 옥천성당은 1945년 무렵 철근콘크리트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옥천성당에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5분 정도 거닐면 정지용 시인의 시세계를 조각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조성한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을 지나고 나면 옥천 구읍으로 들어서게 된다. '옥천 수예점', '옥천 세탁소', '옥천양품점' 등 지역 이름을 딴 가게를 보며 이 곳 사람들이 지역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다.

 
 
▲ 정지용문학관에는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살펴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정지용이 그리워 하던 옥천구읍

옥천 구읍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옥천 구읍은 옥천역이 들어서기 전 옥천 지역의 중심이었던 구도심 지역을 말한다.

옥천 구읍 입구로 들어서면 1909년 사립학교로 지어진 죽향초등학교가 나온다. 죽향초등학교에는 1936년 목조건물로 지어진 옛 교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또 학교 한편에는 육영수여사 휘호탑과 정지용 시비, 죽향리사지삼층석탑 등도 자리하고 있다. 죽향초교를 지나면 한눈에도 오래된 집이라고 느껴지는 김기태 고택 , 서예가 김선기씨의 한옥집 등 오래된 한옥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여행자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간판이다. 정지용 생가로 가기 위해 지나는 거리에 자리한 상점들의 간판은 정지용 시인의 시 구절들을 활용해 이름이 지어졌다.

이런저런 간판과 그 주변에 적혀 있는 정지용 시인의 시 구절들을 읽으며 10여분쯤 거닐면 그의 문학세계를 살펴 볼 수 있는 문학관과 생가가 나온다.

 
 
▲ 정지용 생가로 가는 길가 담장에는 그의 시세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글귀가 걸려 있다.

# 한국 서정시를 개척한 정지용

정지용 시인은 1902년 태어나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치욕적이고 어두웠던 시기인 일제식민지 시대 때 문인으로 활발히 활동한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과정을 이수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한다. 정지용 시인은 휘문고보 재학시절 교내 문예지 창간 작업에 참여하며 활동하기도 했고 도시샤대학 시절에는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문예지에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정지용의 시단 활동은 김영랑(金永郞)과 박용철(朴龍喆)을 만나 시문학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지용이 첫 시집을 간행하자 그를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6·25전쟁 중 실종되며 더 이상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없게 된다.

/김종화기자

 
 
▲ 정지용문학관 앞에 세워져 있는 그의 동상 주변으로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이 거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