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격은 멈추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허벅지에 파편이 박힌 것을 알게 됐다. 충격이 컸던 것일까. 군복 바지가 피로 흥건해지도록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진지는 이미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고, 파편에 맞은 후임병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전남 순천대학 2학년에 다니는 김용섭(22)씨는 연평도 해병부대 공병대원으로 있던 1년 전의 '악몽'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고 했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 북한군의 연평도 기습 포격이 시작됐다. 평온하던 섬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북한이 남한 영토를 향해 직접 포격을 가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60년 만의 일이다. 민간인을 포함한 총 4명(민간인: 고(故)김치백·배복철, 군인: 고(故)서정우 하사·문광욱 일병)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연평도 포격 1년을 맞아 경인일보는 당시 포격 현장에 있었던 해병 장병들과 연쇄 인터뷰를 실시했다.
북한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던 해병대 연평부대 예비역 병장인 김용섭씨는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파편이 허벅지에 박힌 것도 모를 만큼 멍한 상태였다"며 "훈련을 하던 도중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진지 안으로 파편이 튀기 시작했다"고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김씨는 전역(12월 23일 제대)을 불과 한 달 남겨둔 상태였다. 그는 "북한이 본토를 공격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며 "겁도 났었고 다리에 통증도 심해졌지만, 후임병들이 더 크게 다쳐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고 말했다.

세종대학교 캠퍼스에서 지난 17일 만난 양갑동(22)씨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찔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연평도 포격 당시 81㎜박격포 지휘병이었던 양씨는 "어디선가 하늘에서 '쑤우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과 100m 앞에서 '쾅!'하고 포탄이 떨어졌다"며 "마치 비행기에서 쏟아붓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연평도 앞바다에 물기둥이 치솟고, 저 멀리 북쪽의 개머리 진지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북한의 소행임을 직감하게 됐다고 했다. "꿈이었으면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전날 전쟁 꿈을 꾸었거든요. 곳곳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어요. 하다못해 똥개들도 피범벅이 돼 돌아다녔으니까요." 양씨는 지난 4월 전역했다.
최전방에서 함께 고생하던 전우가 쓰러져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연평부대 장병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당시 중대장 차량 운전병이었다는 함기용(23·인천 남동구 간석동)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서정우 병장의 주검을 처음 발견하고도 그냥 지나친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중대장과 함께 차량을 타고, 다친 사람들을 빨리 구조해야 했기에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 병장을 지나치는 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서 병장의 시신에선 한 쪽 발목이 보이지 않았어요."
고(故)서정우 하사·문광욱 일병의 사망 소식에 당시 현장에 있던 해병대원들은 분개했다고 한다. 함씨는 "많은 해병대원들이 '북에 보내달라', '어차피 죽게 될 거면 총이라도 쏘고 죽겠다'며 울부짖었다"고 했다.
해병대사령부는 연평도 사태 이후 해병대원들이 직접 쓴 수기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 중 의무실 이재선 하사가 밝힌 응급실의 상황은 '피바다'였다.
의무병 강병욱 이병도 수기에서 "의무 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의식을 잃고 죽어가는 (故)문광욱 일병을 보았다"며 "몸 색깔이 파랗게 변해가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기가 두려웠다"고 했다. 연평도에 들어온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던 강 이병에 당시 연평도는 '지옥' 그 자체였다.
북한의 목표물은 해병부대 뿐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도 주민들의 절규가 이어졌다. 주민들은 반사적으로 방공호부터 찾았다.
포격이 멈춘 뒤, 주민들은 작은 어선에 몸을 싣고 서둘러 섬을 빠져나왔다. 피란 행렬은 이날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낡고 비좁은 대피소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임승재기자
※ 연평도 주민들 피란생활
포격 첫날 대부분 육지로 '긴급대피'… 악몽같은 그날의 충격 후유증 신음
"한국전쟁 때 보급대에 있었어. 그 때 사람들 많이 죽었지. 말도 말어. 너무 오래 살았어. 나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겪었어."
포격 1년 뒤인 지난 18일 만난 연평도 주민 박연수(88)씨는 "피란을 나갔으니 전쟁 아니냐. 피란생활 동안 고생이 많았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박씨는 한국전쟁 당시 보급대에 있으면서 실탄과 군량 등을 날랐다. 이북에서 살던 박씨는 27살 때 연평도에 왔다. 한국전쟁 때 피란 나온 곳이 바로 연평도다. 더 이상 피란생활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든 살이 넘어 또다시 피란을 겪어야 했다.

연평도 주민들은 북한의 포격으로 한동안 섬을 떠나야 했다. 국내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첫 피란생활인 것이다.
포격 첫날부터 연평도 주민들은 어선, 행정선, 해군함정을 타고 뭍으로 나왔다. 공무원과 군인을 제외한 연평도 주민 대부분이 섬을 떠났다. 이들은 인천시 중구에 있는 인스파월드(찜질방)에 머물다가, 같은 해 12월19일 경기도 김포시 양곡지구에 위치한 LH아파트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
인스파월드와 LH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열악했다. 찜질방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일부 주민들은 두통, 불면증, 소화장애 등을 겪었다. LH아파트의 경우에는, 한 집에 2~3가구가 함께 생활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연평도 주민들은 2011년 2월13일부터 귀향길에 올랐다. 북한의 포격으로 집이 망가지거나 불에 탄 주민들은 연평초등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조립식 임시주택에서 살아야 했다.
주민 대부분은 '외상 후 스트레스'(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안경애(64·여)씨는 "포탄이 석유통에 떨어져 집이 불에 탔다"며 "그 때 양치질을 하려고 목욕탕에 있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애들 아빠는 월남전에도 참전했지만, 그 일을 겪은 뒤부터 몸이 마르고 기억력이 많이 나빠졌다"고 말했다.
연평도/목동훈기자
※ 포격전에 쓰인 남·북한 무기
북측 동굴진지 해안포·견인포 공격… 해병대 주력화기 K-9 자주포 '응전'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 1차 포격에 이어 3시12분부터는 2차 포격까지 있었다. 1차 때는 150발을, 2차 때는 20발을 쏘았다. 이 중 약 80발이 연평도 본토로 떨어졌다. 우리군은 두 차례의 포격 당시 해병대 연평부대 주력 화기인 K-9 자주포로 대응사격을 가했다.
북한군이 연평도를 향해 쏜 해안포 등은 황해도 강령군에 위치한 옹진반도 남단 개머리와 무도 진지에서 인민군 제4군단 직할 또는 예하 보병부대의 주도 아래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개머리 진지와 무도 진지는 연평도에서 각각 13㎞와 7㎞가량 떨어져 있다. 북한군이 당시 사용한 무기는 76.2㎜ 해안포(사거리 12㎞)와 122㎜ 견인포(사거리 24㎞)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외에도 북한군은 개머리 등 서해안 일대 주요 진지에 각종 해안포(평사포, 곡사포)와 자주포, 방사포(다연장 로켓포) 등의 화기를 집중 배치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군의 해안포는 포문이 있는 동굴 진지 안에 배치돼 있다. 따라서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는 곡사화기인 K-9 자주포는 이 같은 해안포 진지를 직접 타격하는데 한계가 있다. 우리군이 연평부대에 각종 최첨단 관측 탐지장비와 함께 K-9 자주포를 증강 배치하는 한편, 북한군의 해안포 진지를 직격할 수 있는 다연장 로켓포인 '스파이크 미사일'을 도입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연평도 포격사태 1주기를 앞두고 개머리 진지 부근 해안가에서 수십 곳의 포 진지가 추가로 발견되고, 북한이 서해 상공에 공대함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는 등 긴장감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임승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