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넘버 684…." 각자 전투 배치된 위치에서 북한 경비정의 동태를 살피는 사이, 바로 옆 함교에서 故 윤영하 대위(당시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 정장, 소령 1계급 추서)와 이희완 중위(당시 부정장, 현재 소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때였다. "콰과광!", "콰과광!"…. 북한 경비정에서 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웅~" 하며 바람을 거세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빗발치듯 총탄이 쏟아졌다. 순식간이었다. 탄환 한 발이 왼손으로 쥐고 있던 총열 덮개를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몸이 뒤로 나자빠졌고, 의식도 잃었다.
월드컵 분위기로 온 나라가 들썩일 때 북한군과의 교전 현장에 있었던 권기형(30)씨는 10여 년이 지났지만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22일 오후 6시30분, 경북 구미시내의 한 커피숍. 검은 색 양복 차림의 권씨와 만났다. 문상을 가는 길이라고 했다. 권씨는 교전 당시의 대화 내용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정장님, 살았나 확인해!" 함교 쪽을 향해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눈앞은 온통 희뿌연 연기로 뒤덮여 있었고, 갑판 위로는 핏물이 흘렀다. 윤 대위와 이 중위는 쓰러져 있었다. 총탄이 뚫고 간 왼손에선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엄지와 검지 등 손가락은 뼈가 다 부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도 감각이 없었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을 뿐이었다.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선체 곳곳에서 총탄 파편이 튀고 불길이 치솟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대로 있다간 몰살당할 것만 같았다. 함교 아래 갑판에 쓰러져 있는 윤 대위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맥박이 전혀 뛰지 않았다. 다행히 이 중위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다리에 큰 총상을 입어 출혈이 심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일까. 전창성 하사와 함께 함교 쪽 철판을 맨손으로 뜯어내 그 곳으로 이 중위를 옮겼다.
"완전히 이성을 잃었던 거죠. 그 많은 총탄이 날아오는 와중에 한 발도 안 맞고 서서 총을 쏴댔으니 말이에요. 그때 일을 얘기하려면 참 긴데, 어찌 보면 순식간이었고…."
'제2차 연평해전'은 이랬다. 서해 NLL 해상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퇴각을 요구하는 우리 '참수리 357호'를 향해 기습적으로 85㎜ 등 함포사격을 가하면서 교전은 시작됐다. 북한 경비정은 작정한 듯 편대를 이뤄 함께 움직이던 우리 해군 고속정 2척(참수리 357·358호) 가운데, 뒤따르던 357호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즉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교전으로 우리 해군 6명(故 윤영하 소령, 故 한상국 중사, 故 조천형 중사, 故 황도현 중사, 故 서후원 중사, 故 박동혁 병장)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했다. 357호는 예인 도중 침몰했다. 북한 경비정은 오전 10시50분께 반파된 채 북으로 퇴각했다.
권씨는 악몽과도 같았던 그날의 끔찍한 기억을 하나 둘씩 더듬어갔다. 그는 "앞에 있던 북한 경비정에서 불이 뻔쩍거림과 동시에 주요 포대와 조타실 등 선체 대부분이 한꺼번에 벌집이 됐고, 함교에 위치하고 있던 정장과 부정장도 각각 목과 다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고 했다. 그는 또 "당시 총탄이 뚫고 지나간 내 K-2 소총에 사선 방향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보면, 조금만 각도가 옆으로 향했어도 나 역시 머리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고 했다. 권씨는 교전 당시 총상을 입었던 왼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K-2 소총 총열 덮개를 쥐고 있던 손이었다. 수술을 6번이나 받았지만, 여전히 엄지와 검지, 그리고 약지 손가락을 거의 쓰지 못한다.
"기자님, 잠시만요. 저 심호흡 좀…." 인터뷰 도중 권씨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미안합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게, 잘 되지가 않네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몸에 신호가 옵니다. 손발이 저리고 호흡도 가빠지고…. 지난해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많이 힘들었죠."
권씨는 당시 총성이 멈춘 뒤로는 기억이 중간 중간 끊겨 있다고 했다. 울분에 못 이겨 41포로 들어가 사격을 하려는데, 황창규 중사가 달려와 "적의 표적이 된다"며 자신을 밖으로 끄집어 냈던 일, 총상을 입은 몸으로 불을 끄겠다고 소화 호스를 집어들다가 358호 김주성 병장이 "이제 진정하라"며 붙들었던 일….
한국전쟁 이후 연평도 등 서해 5도 인근 해역은 오늘날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한반도의 화약고'로, NLL를 둘러싼 남북간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는 '분쟁의 바다'가 됐다.
'서해교전'의 첫 시작은 1999년 6월 15일 발발한 '1차 연평해전'이었다. 북한 경비정들이 꽃게잡이 어선 단속을 빌미로 연평도 쪽 NLL 해상을 넘어오자 우리 해군 함정들이 선체로 들이받는 이른바 '밀어내기' 작전을 폈다. 당시 북한 경비정은 25㎜ 기관포 등으로 선제 공격을 가해 왔고, 이에 해군이 초계함의 76㎜ 함포와 고속정의 40㎜ 기관포로 응사해 북한 어뢰정 등을 침몰시켰다. 한국전쟁 이후 서해상에서 벌어진 남북간 첫 교전이었다.
그리고 2002년 6월 29일 2차 연평해전이 터졌고, 2009년 11월 10일 대청도 앞바다에서 또다시 교전이 벌어졌다. 바로 '대청해전'이었다. 당시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 1척은 해군의 대응사격으로 파괴돼 북으로 퇴각했다.
지난해 3월 26일엔 해군 초계함인 '천안함'이 백령도 앞바다에서 두 동강이 난 채 침몰했고, 11월 23일에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임승재기자
※ '천안함 침몰' 생존장병에게 들어보니
좌측 후미 '꽝' 소리후 정전… 다친 장병·부하들부터 구조
2010년 3월26일 오후 9시22분께 인천 백령도 연화리 서남방 2.5㎞ 해상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했다. 침몰 당시 104명의 승조원이 있었다. 생존자들은 좌측 후미에서 '꽝! 꽈~아앙'하는 소리와 함께 정전이 되면서 몸이 30㎝에서 1m 정도 떴다가 우측으로 떨어졌다고 증언한다.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서보성 하사는 전투상황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서 하사는 당시 충격으로 한동안 정신을 잃었고, 대퇴부가 으스러지고 눈을 다쳤다.
오후 10시15분께 인천해양경찰서 501함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천안함 생존자 구조작전이 진행됐다.
당시 501함 부장(부함장)이었던 유종철 경위는 "두 대의 고속단정을 501함에서 내려 생존자 구조작업을 벌였다"며 "포대와 조타실 좌현 쪽에 생존자들이 몰려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만난 유 경위는 "아픈 사람과 졸병부터 차례대로 구조했다"며 "구조 당시 7명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덧붙였다.
해경 등에 의해 구조된 승조원은 총 58명이다. 약 한 달 동안 진행된 인명구조작업·함체인양작전에서 나머지 승조원 가운데 40명은 함미와 함수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6명은 유해를 수습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인명구조에 나선 UDT 한주호 준위가 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또 천안함 실종자 탐색작전에 참가했다가 조업구역으로 이동하던 제98금양호(민간 저인망어선)가 상선과 충돌해 침몰, 2명이 숨지고 7명이 실종됐다.
천안함은 함수와 함미로 두 동강이 났다. 민·군 합동조사단은 "천안함은 북한에서 제조한 감응어뢰의 강력한 수중폭발에 의해 선체가 절단돼 침몰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은 언론매체를 이용해 "남한이 천안함의 북한 연루설을 조작했다",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는 남한의 날조극이다"고 비난했다. 국내 언론인·교수·국회의원·시민단체 일부도 '우현 프로펠러의 휨 현상'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등 천안함 침몰 사건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목동훈기자
※ 제2차연평해전 참수리호 탑승장병 권기형씨
전역후 '외상후 스트레스' 고통… 나라위해 희생한 넋 기억해주길
제2차 연평해전은 21살 청년의 꿈과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전역과 동시에 그의 삶은 방황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권기형(30)씨는 그해 2002년 12월 말 의병 전역한 뒤 이듬해 그가 다녔던 한국농업전문학교(현 한국농수산대학)에 복학했다. 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현장 실습에 참여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경북 의성이 고향인 그는 오래 전부터 농업 전문 경영인을 꿈꿔왔다. 농사를 짓고 있는 부모님도 가업을 이으려는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권씨는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다. 그가 다닌 대학은 졸업한 뒤 일정 기간 농업에 종사하면 대체복무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권씨는 "훗날 사회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해군에 지원하게 됐다"고 했다.
권씨는 아직까지도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감정 조절도 잘 안 되고, 잠도 제대로 못 자, 한동안 술에 의지해 살았었다. 권씨는 다친 손 때문에 번번이 취업에 실패했다. 권씨는 "목숨을 잃은 전우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아무 것도 못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고 했다. 다행히 올해 초 권씨에게 희소식이 찾아왔다. 국내 대기업에서 그를 채용한 것이었다. 권씨는 "일을 하는 그 자체가 너무 기쁘다"며 "유가족들에게도 이제는 당당할 수 있다"고 흐뭇해 했다.
권씨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 "꼭 한 가지만 부탁드릴 게 있다"고 했다. "제2차 연평해전, 그 일로 목숨을 잃었거나 부상을 입고 힘겹게 살아가는 장병들의 이름을 모두 다 기억해 주시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2차 연평해전 당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라도 마음 속에 간직해 주셨으면 합니다."
/임승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