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7월 경기도 풍덕(豊德·지금의 북한 개풍) 살던 안추원(安秋元)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13세 어린이였다. 병자호란을 미리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정은 강화도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겼다. 그러나 강화도는 함락됐고, 안추원은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선양으로 끌려간 뒤 한족 대장장이에게 팔렸다. 1644년에는 베이징까지 강제 이주해야 했다. 26년이 흐른 1662년 안추원은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혔다. 산해관에서 체포돼 얼굴에 죄명을 찍히는 자자형을 받았다. 그는 2년 뒤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해 결국 성공했다. 조선 조정은 28년 만에 탈출해 귀국한 안추원을 고향인 풍덕으로 보냈다. 하지만 풍덕에는 부모형제가 없었다. 숙식을 제공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제대로 된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 부모를 잃은 처지에 생계마저 막막해진 안추원은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발길을 돌렸다. 중국에 입국하자마자 다시 붙잡혔다. 조정은 청나라로부터 문책을 받을 것만 걱정할 뿐이었다. 안추원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차례나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건만, 조국은 그를 버린 것이다.
#상황 2
한국전쟁 정전협정을 체결하고도 6개월이나 더 지난 1954년 1월 20일 0시, 판문점의 인도군 관할 포로수용소에서는 수천 명의 반공포로가 일제히 석방됐다. 이들 중엔 박종은(朴鍾殷)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포로생활만 1천200여 일을 한 그다. 그의 기막힌 포로역정은 1950년으로 거슬러 간다.
1950년 4월, 해주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청년 박종은은 평양군관학교에 입학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북한군 징집을 피해 박종은은 단신으로 서해상을 통한 월남을 단행했다. 목숨을 걸고 내려온 38선 이남의 옹진군 동강지서에서 '위장 월남'으로 의심을 받고, 되돌아가야 했다. "월남하려면 가족과 함께 오라"는 지서장의 '협박' 때문이었다. 해주로 되돌아간 박종은은 함경북도 경성군 어량면 산골로 도망가, 토굴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추격대를 피하지는 못했다. '징집 기피자'가 돼 45일 만에 체포된 것이다. 두만강 홍의수용소에 갇혔다. 그리고 1950년 9월, 인민군에 강제 징집된다. 일본군 육군 제44부대가 있던 곳에 세워진 나남훈련소에 입소했다. UN군의 북진이 한창일 때다. 곧바로 부대배치를 받았으나 탈영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 고향 해주로 내려가면서 죽을 고생을 한 박종은은 길주 부근의 국군 헌병초소에서 불을 쬐다가 포로 신세가 됐다. 인민군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강제로 끌려갔고, 도망쳤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부산포로수용소를 거쳐 1951년 3월, 거제도 제73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남한 출신은 부산에 남기고, 북한 출신을 격리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박종은은 1952년 초, 논산포로수용소 생활을 시작한다. 공산포로는 거제도에 잔류시키고, 반공포로를 부산, 마산, 광주, 영천, 논산 등지로 분산 수용했기 때문이다. 논산에서 1년 정도 포로로 갇혀 있던 박종은은 1953년 봄에 부평포로수용소로 옮긴다. 고향과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 '로비'를 벌인 덕이었다. 그러던 중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정권의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못한 부평의 포로들은 집단 탈출을 감행했고, 박종은처럼 실패한 나머지 포로는 다시 논산수용소로 가야 했다. 그리고 다시 중립국 판문점 수용소로….
전쟁은 시공을 초월해 닮았다. 사람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을 예사로 안다. 권력자들은 무능하기 그지없다. 국가의 크고 작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상황 1의 안추원과 상황 2의 박종은의 처지는 3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건만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 통에 끼인 백성의 삶이란 다 그럴 것이다.
안추원의 부모는 국가가 그토록 믿고 장담하던 '요새' 강화도에 들어가면 안전할 줄 알고, 가족을 인솔하고 숨었으나 어림없었다. 어린 안추원은 포로가 돼 중국인의 노비로 사는 처지가 됐다. 탈출을 감행했다가 붙잡혔다. 도망치다 붙잡혀 얼굴에 불도장이 찍혔다. 고향을 잊을 길이 없어, 다시 탈출에 나서 드디어 성공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반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라마저 외면하는 곳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다. 국가를 믿고 있다가 포로가 됐고, 가족을 잃었다. 그런 국가는 포로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다시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박종은의 처지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인민군을 피해 월남했는데, 받아주지 않아 북으로 되돌아가 깊은 산속에 숨었다. 붙잡혀 강제 징집됐으나, 용하게도 전투 중 탈영에 성공했다. 북이 싫어 탈영한 박종은은 그러나 남한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만다. 그 뒤로 3년 6개월의 포로생활, 죽을 고비는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그는 여전히 포로여야 했다. 처음 월남했을 때 받아만 줬더라도, 그리고 목숨 걸고 탈영해 고향으로 가던 중 '구세주'인줄 알았던 남한군에게 포로만 되지 않았더라도. 박종은에게, 남북 어디에도 '국가'는 없었다.
취재팀은 지난 1년 동안 인천이란 특정 지역을 무대로 해 빚어진 전쟁의 역사를 찾아 나섰다. 현장을 다시 살피고, 사람을 만났다. 각종 서적을 뒤졌다. 멀리 있는 세계의 전문가들까지 연결했다.
1231년 여몽항쟁, 1627년 정묘호란, 1637년 병자호란,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50년 한국전쟁, 그리고 잇단 서해교전까지. '인천의 전쟁'에 얽힌 800여 년의 세월을 훑었다. 물론 1592년의 임진왜란이 인천을 벗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인천이 그 전쟁의 중심이었다고 특정할 수 없어 제외했을 뿐이다.
인천은 왜 이렇게도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을까.
취재 과정에서, 전쟁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했다.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것임도 잘 알게 됐다. 반복되는 전쟁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줬다.
'전쟁의 도시, 인천'은 역설적이게도, '인천의 평화'가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평화의 길로 안내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을 일러줬다.
2011 연중기획, '세계의 전장(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는 인천을 중심무대로 한 전쟁의 역사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얘기하고자 했다.
한국戰중 인천에 포로수용소 2곳 운영… '부평 반공포로 탈출' 사건 진실 밝혀야
■ 인천포로수용소와 부평포로수용소
전쟁이 있으면, 반드시 포로가 있게 마련이다. 전쟁의 끝자락에서 쟁점이 되는 것도 포로교환 문제다. 인천이 한국전쟁의 '상징도시'가 된 것은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있지만, 한국전쟁과 인천을 말할 때 그냥 지나쳐선 안 될 게 있다. 포로수용소에 얽힌 얘기다. 한국전쟁 기간 인천에는 포로수용소가 2곳이나 설치됐다. 전쟁 초기의 '인천포로수용소'와 후반기의 '부평포로수용소'다. 2곳 모두 운영기간이 3개월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그 의미는 크다.
'인천포로수용소'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설치됐다. 미군은 상륙작전 이후 늘어나는 포로를 가두기 위해 인천, 서울, 평양, 대전, 원주 등지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인천포로수용소는 인천소년형무소를 개조해 사용됐으며, 2천500명가량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미군이 맡았다. 1개월 정도 지난 뒤 한국군이 배치됐다. 조성훈이 쓴 '한국전쟁과 포로'에 따르면 초기에는 6천여명의 포로가 있었고, 11월 초에는 3만2천107명으로 급증, 2개 동을 추가로 건설했다. 중국군 개입 이후인 1950년 12월 폐쇄됐다. 포로들은 부산수용소로 옮겨졌다. 당시 인천소년형무소는 지금의 인천시 남구 학익동 인천구치소 자리에 있었다.
'부평포로수용소'의 실상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상 막판인 1953년 6월 18일 0시에 전국의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전격 석방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다. 하지만 부평포로수용소는 우리나라 미군주둔의 역사는 물론이고, 한국전쟁 포로 문제와 관련해 무척이나 중요한 '공간'이다.
부평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박종은(朴鍾殷)씨가 기록한 'PW-포로수용소생활 1,200일 실화'에 따르면, 부평포로수용소는 1953년 봄에 설치됐다. 여기에는 1천500명의 반공포로가 수용됐으며, 수용자들은 미군보급기지창인 에스캄 건설작업에 동원됐다.
특기할 것은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 때 부평수용소만 제외됐다는 점이다. 수용소장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저자는 수용소장이 '빨갱이'였기 때문에, 석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수용소에서 라디오로 '반공포로 석방' 사실을 접하고, 자신들만 계속해서 갇혀 있다는 사실에 울분을 참지 못하던 포로들은 이튿날인 6월 19일 밤 10시20분, 집단탈출을 감행해 30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일부는 정문을 무너뜨리고, 또 일부는 철조망에 담요를 덮고 넘어갔다고 한다. 미군은 탈출하는 반공포로들에게 사격을 가했고, 이 총격으로 무려 47명이나 사망했다. 다친 사람까지 합치면 사상자는 500여명이나 됐다고 한다. 나머지 700여명은 잔류했으며, 이들은 1주일 뒤 논산수용소로 이송됐다.
당시 언론은 미군 측의 일방적 발표에 의존해 기사를 실어, 사망자 수나 사망원인 등이 제각각이다. 아직도 이 문제는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다. 사망자는 누구이고, 어떻게 처리됐을까. 꼭 밝혀져야 할 일이다.
부평포로수용소 자리는 미군기지 캠프마켓 건너편에 있는 지금의 부영공원 부지로 보인다. 부평은 일제 때의 군수기지로, 한국전쟁 때부터 지금까지는 미군기지로 땅을 내줘야 했다. 부평의 역사는 '포로수용소'의 아픔까지 더해야 하게 됐다.
인천 향토사학자로 '현대시조 선구자'… 종군기자 활동 최전선의 모습 그려내
■ 최성연의 '전쟁 문학'
소안(素眼) 최성연(1914~2000) 선생은 인천의 향토사학자로 유명하다. 1883년부터 1920년대까지 인천의 개항 초창기 모습을 세밀하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 '개항과 양관역정'이 대표작이다. 최성연 선생은 또 현대시조의 선구자로도 불린다. 1955년 7월 동아일보가 창간 35주년과 지령 1만호 발간을 기념해 실시한 현상 문예작품 공모에서 현대시조 부문에서 '핏자국'이란 작품이 당선됐다. 눈길을 끄는 것은 최성연 선생의 작품 중에는 몸으로 경험한 전쟁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는 점이다. '핏자국'이 바로 그렇다.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최전선에서 보고 느낀 바를 작품에 담은 것이다. 이름을 붙이자면, '종군 시조'라고 해야 할까.
최성연 선생이 1988년에 펴낸 시조선집 '갈매기도 사라졌는데'에는 1952년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쓴 작품과 1951년 1·4후퇴 당시의 처절한 삶의 현장을 담은 작품이 몇 수 실렸다. '갈매기도 사라졌는데'의 제4부는 제목 '녹슨 파편'이 주는 느낌대로 전쟁과 관련된 것들을 모았다. 김화(金化), 화천, 철원 등 전선(戰線)에서 쓴 작품 6편과 1·4후퇴 때의 현장기록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13편 등이다. 최성연 선생은 제4부를 설명하면서, "전쟁 후 그렇게 오래도록 버려진 녹슨 응어리들은, 이젠 잊혀졌어도 마땅할 것들이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곱이 낀 채 남아있는 흉물들이다"라고 했다. 30년이 넘었지만 도저히 잊히지 않는 '응어리'란 얘기다.
'밀 보리 가꿔놓고/걷을 짬도 없었길래//제물로 스러졌다/절로 다시 돋아나서//이삭은/또 여물었는데/가을 걷이 뉘하려노'(1952년 金化골에서)라는 작품 '戰禍(1)'은 들에서 곡식을 챙기지도 못하고 다급히 피란을 떠난 백성들의 아픈 현실을 담았다. 또 '길가 덤불속에/때 아닌 웃음소리//입술 까만/사병(士兵) 서넛/희죽대며 내달리다//이쯤도/누에 치던 말(村)이던가/오디 꽤나 익었네.'(1952년 중부전선에서)는 제목 '오디'에서 풍기는 맛처럼 전장에서도 가끔씩 다가오는 서정적 장면을 기막히게 포착했다. 또한 '戰禍(4)'라는 작품은 정전협정 2개월 후인 1953년 9월에 썼는데, 풍성해야 할 가을이지만 전후의 아픔이 짓누르는 인천의 고통을 담고 있다. '부평(富平) 벌판 저멀리/띠엄 띠엄 포플라 섰고//고요만이 깔린 들판에/벼이삭은 처졌는데//아직도/남아 울부짖는/전쟁 파편의 녹슨 소리.' 경인선 열차를 타고 '부평포로수용소' 부근을 지나면서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작품이다. '종군기자' 최성연 선생은 '전쟁'과 '문학'에 대해서도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다. 그의 '종군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정진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