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산미술관은…

高村 대표 '지역문화공간' 유망작가 아낌없는 지원도

보름산미술관은 김포시 고촌(高村) 보름산 자락에 자리잡은 '지역문화공간'이다. 그림뿐만 아니라 목가구와 석물 그리고 옛기와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차를 마시고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작은 음악회를 만날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1일부터 '보름산미술관 소장품展'이 진행중이다.

장정웅 관장은 "제아무리 훌륭한 수집이라도 수집의 운명이 참으로 덧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며 "다른 사람은 커녕 자기 자신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할 정도로 창고 깊숙이 꼭꼭 가둬두는 수집을 하는 것은 수집을 개인의 재산이라 여기는 경향이 너무 강한 탓"이라고 꼬집어 말했다. '작품들을 공공의 영역으로 이전한다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여러 다양한 뜻있는 역할을 수행해 줄것'이라는 그의 생각이 보름산미술관을 세웠다.

보름산미술관은 역량있고 유망한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작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모든 시각예술분야의 지원을 받지만 지원 자격은 '현재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자'로 제한했다. 전시 공간을 제공하고, 전시 홍보를 지원한다. 예술지상의 열정을 가지고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 여러분들이 포트폴리오와 전시계획서를 들고오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전시장 관람시간 하절기(4~10월) 오전 10시~오후 6시, 동절기(11~3월) 오전 10시~오후 5시. 일요일은 오후 1시 개관.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설과 추석은 쉼. (031)985-0005. www.boroomsan.com


미술관 주변 경관이 가관이다. 딱 반으로 갈라 한 쪽은 재개발로 사람냄새가 지워져가는 빈집들이 휑뎅그레하다. 맞은편엔 높이 솟은 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 틈바구니에 보름산 미술관이 두둥실 떠있다. 그것들을 마주보듯 혹은 숨어있듯, 어쩌면 그것들을 내려다보듯. 40년 전 미술관 건립이 꿈이던 젊은이는 미술학도가 되고 사업가도 되고 아버지를 거쳐 할아버지가 되는 동안 마침내 번듯한 미술관 주인이 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스케치북만한 수묵화를 보고 반해 평생 그림쟁이가 됐다는 장정웅 화백은 눈가의 주름 한 줄, 하얗게 쇤 머리카락 한가닥, 손등의 굴곡 하나에까지 아직 낭만이 서려있다. 그런 그가 풀 한포기 기와 한 장까지 제 품팔아 지어낸 김포시 고촌의 보름산 미술관에서 예술가가 미술관을 차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역마살

미술관이든 박물관이든 '수집'하는 사람들이라면 저마다 '돌아다닌 이야기' 한가락씩은 한다. 우리나라 작은 땅덩어리를 넘어 해외의 낯선 이름까지 제집 주소 부르듯 읊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장 화백은 '급'이 다르다. "민속품 모으느라 면단위로 다니며 온나라를 뒤지고 다녔지. 70년대에 빈집 돌아다니면서 쑤시고 다니다 간첩으로 오해받아 파출소로 끌려간 것도 몇번이나 돼." 장 화백이 대학생이었던 60~70년대는 헌것은 다 버리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우리나라 1호 사립박물관인 '온양 민속박물관'이 문을 열었는데 장 화백에게 이 박물관은 충격이었다. 다들 내다 버리는 오래된 민속품을 모아 '전시'를 한 것이다. 미술품의 범위와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장 화백은 이 때부터 열심히 모으기를 시작했다.

다 같이 없이 살던 시절에 그는 자신의 보물을 '얻어서' 모았다. 엿장수가 다니면 리어카에 실린 물건을 유심히 보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고철과 바꿨다.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를 찾아가 막걸리 한사발을 나누어 마시며 동네이야기를 하다 '어느 집에 무슨무슨 물건이 있다더라'하면 달려가 사정해 얻었다. 첫 수집품은 도자기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부천의 공동묘지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게 됐다. 공사가 시작되고 땅을 파는데 포클레인이 지나간 자리에서 도자기며 그릇들이 삭은 뼛조각처럼 부서져 나가는 게 보였다. 아이고 저 귀하고 예쁜 것들이….

작업 반장한테 술 한잔 사주며 작업(?)을 한 끝에 청자 서너점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했으니 계속 그렇게 했다. 미술작품도 사정은 비슷하다. 다른 작가의 전시품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작가와 협상해 자신의 그림과 맞바꿨다. 그런 그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찾아헤맨 것이 따로 있었는데 돈으로 사기에는 애매한 것이었다.

 
 
▲ 장정웅 화백이 30여년간 수집해온 망와가 전시돼 있다.
■ 망와

장 화백을 면단위로 국토 대장정하게 만든 것은 '망와(望瓦)'다. 망와의 사전적 의미는 '용마루 끝에 세우는 암막새'다. 그러나 장 화백에게 망와란 "한자로 바랄 망에 기와와자를 쓰는 망와는 집집마다 바라는 것을 문양으로 새겨 직접 손으로 찍어 만든 단 하나뿐인 그 집의 문패이자 얼굴"이며 "특히 우리나라 망와에는 전통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가 융합된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한옥의 디자인포인트라 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평생을 바친 열정과 희망의 상징"이다.

자신을 망와 작가라고 칭하는 장 화백은 망와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주름이 펴지는 듯했다. "한국식 기와집의 마무리 기와로, 기와 지붕 한 채에 6개가 올라가는데 망와에 새긴 문양이 아주 다양하지. 글자도 있고, 사람 얼굴 모양에 동물, 꽃에 지금 봐도 현대적 감각이 느껴지는 형이상학적 무늬까지…얼마나 예쁜지 몰라." 망와를 찾아다니며 속상한 때도 많았다.

"망와가 공사판에서 깨져나가고, 노인들만 남은 시골 집에서 관리는 고사하고 이끼와 곰팡이에 형체를 잃어가는게 안타깝지. 남의 집 지붕에 있는 걸 막무가내로 떼올 수도 없고… 한 번은 암자의 기와 한 장을 보려고 한 여름 몇 시간 산을 탔는데 막상 가보니 양철지붕으로 바뀌어 있기도 하고 그랬지."

30년 전부터 수집한 망와가 지금은 400여점이나 된다. 가져올 수 없는 것들은 사진을 찍어 자료로 남겼다. 대학원 논문 주제도 망와였고 요즘은 망와를 모티브로 한 그림작업에 푹 빠져 지낸다. 변덕많고 까다롭고 예민함의 대명사로 여겨지는게 예술가건만 장 화백의 한결같은 망와사랑이 별나다 싶더니 예술가 후배들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 예술가로 40년을 살아온 장정웅 화백이 작업실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 예술 좀 한다는 이들에게

"의사는 사람 병 고치려 공부하고 목사는 포교위해 공부하는건데, 그렇다면 예술가는 무엇을 할 것이냐. 세상을 아름답게 해야하지 않겠나. 자신이 가진 예술적 재능을 사회에 환원해야지. 공부의 값어치는 거기에 있는 거야." 예술가로 40년을 산 장 화백은 예술가들이 자기만 아는 옹고집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예술은 다 같이 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천의 일환으로 보름산미술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관람객이 한달에 300~400명에 달하는 나름 잘나가는 미술관이 된 것은 무료입장의 힘이 아니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지론을 가진 장 화백은 미술관이라 이름은 붙였지만 미술작품 전시실옆에 민속품 전시관을 지어두었고 그 옆에는 찻집과 책방을 꾸미고 그 아래는 문화교실을 차렸다.

"이제는 미술관의 개념이 달라져야 해. 과거에는 소장품 관람하고 가는걸로 끝났지만 그게 무슨 의미야. 사회교육, 학교에서 배제된 교육을 지역 미술관이 담당하면 여러가지 사회문제도 해결되는거야. 미술관 만든 목적도 거기 있지." 다소 계몽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나 싶더니 마지막 덧붙인 한마디가 역시 예술가구나 싶다.

"기부문화가 싹트고 있지만 배고픈 사람, 아픈 사람 한테만 도와주는게 기부가 아니야. 외국에는 박물관, 미술관에 유산을 남기는 경우가 많지. 먹는데 기부하면 먹어서 다 없어지지만 예술에 기부하면 미술관이 존재하는 한 기부자의 뜻도 사라지지 않아. 이렇게 하면 영원한 기부가 되는 것이지."


글┃민정주기자
사진┃김종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