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동에서 조종하면 현창으로 향하는 길.
가평군은 동쪽으로는 강원도 춘천시와 홍천군, 서쪽으로는 남양주시, 남쪽으로는 양평군, 북쪽으로는 포천군· 강원도 화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가평은 강원도와 인접한 지리적인 여건과 각 시대마다의 사회환경 등에 따라 신라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강원도와 경기도를 오가며 예속되는 등 행정구역에 많은 변화를 보여왔다. 교통로 역시 그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 오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가평지역을 중심으로 한 과거의 교통망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대마다 수도를 중심으로 교통망이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과 영서·영동을 이어주던 중요한 교통로인 춘주도 일부의 역(驛)이 가평에 속해 있었다. 춘주도 중에서 가평지역에 속한 역은 감천(현재 청평면 상천리)과 연동(상면 연하리) 등 두곳이다. 조종-가평-춘주(춘천) 등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당시 수도 개경에서 북한강 중·상류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었으며 개경과 강원도를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고 전해진다.현재의 국도 46, 37번 도로의 뿌리인 셈이다. 이 도로들은 오늘날 가평군을 횡 또는 종으로 관통하며 인접 시·군을 이어주고 있다.

# 그 옛날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향하던 상경길 국도 37번 도로

가평군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조선이 건국될 즈음부터 독립된 행정단위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교통로의 형성은 고려시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평의 지형은 산이 많아 기본적인 도로는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옛길을 뿌리에 두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가평에서 37번도로를 이용하려면 서울방향으로 가다 청평검문소로 우회전하면 비로소 시작된다. 길은 조종천과 함께 장고의 시간을 함께 하며 과거와의 소통을 위해 그자리에서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포천으로 향하는 길(수도 개경으로의 교통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조종천과 37번 도로를 따라 형성됐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가평지역에서 개경으로의 교통로는 국도 46번 도로의 청평면 상천리 감천역을 지나 국도 37번도로의 상면 연하리 연동역으로 향하는 길이다.

역(驛)은 주로 육상도로를 바탕으로 국가의 여러 명령과 공문서, 군사 정보를 전달하고 사신 및 정부 관료의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마련됐다. 감천역은 조선시대까지도 현 상천역 부근에 설치돼 서울이나 지방관서를 왕래하는 관리들의 침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운영됐었고 점막이라고 불리는 여관도 들어서 성행했었다고 전해진다.

▲ 점말부락의 현재 모습.
국도 46번도로를 벗어나 조종천과 함께 시작된 길은 현재 노선이 이원화되어 마을을 경유하는 옛길과 최근에 개통된 자동차 전용도로로 나뉜다.

옛 시대부터 고려, 조선, 일제 강점기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활상에 따라 일정부분 교통로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이는 현재의 도로건설기술이 최첨단으로 무장했다고는 하나 산과 하천 등 지형지물 형성에 따라 만들어진 옛길에 뿌리가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37번 옛길은 가평의 지형에 맞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 주던 중요한 교통로로 수백년을 이어 지금까지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37번 도로는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여러 마을을 지나치게 된다. 임초리, 항사리, 조종상면, 역말, 조종하면, 율길리….

37번 국도에서 시작된 또 다른 소통의 길이 임초리에서 시작된다. 바로 임초리 행현리 일대의 주민들이 남양주의 마석장을 보기 위해 행현리 수리넘어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콩 한가마니를 마석장으로 지고가 소금과 바꿔오곤 했었다'고 주민들은 귀띔한다. 임초리에서 속칭 개누리고개를 넘으면 항사리가 시작된다. 개누리란 고개 지형이 마치 누각(樓閣)의 다락문을 여는 것 같이 환하게 트인 형국이라고 하여 개누리(開樓里)라고 표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개누리고개에서 먼 발치를 바라보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운악산이 예전 조종현 들판을 내려보는 듯 웅장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원화된 37번도로는 각각의 지점에서 출발해 이곳 개누리에서 만난뒤 다시 목적지를 행해 각자의 길로 갈라진다. 현재와 과거가 스치며 또다른 이야기 속으로 안내하는 듯하다.

예전에는 교통수단이 제대로 발달되지 못해 수도로 통하는 지역 곳곳에 역우(驛郵)를 설치하고 그곳에 말과 마부를 상주케하고 중앙이나 지방으로 연락하는 관리들의 교통편의와 숙소 등을 제공했다. 이러한 역우가 있었던 곳이 바로 연동역 또는 역말. 지금의 상면 연하리인 것이다. 연동역에도 조정으로 왕래하는 관리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말(馬) 1필과 마부가 상주했다고 한다.

연하리는 상면 사무소 소재지로 예나 지금이나 상면의 중심지다. 옛 문헌에 의하면 지금의 연하리에 연동역이 설치되어 역촌도 발달해 지금까지 이곳의 이름이 역말이라고 불리고 있다. 연하리에는 조종상면과 하면의 환곡미를 저장하기 위한 현창(縣倉)과 조선말기에 이르러 새로 설치된 조종상면의 사창(社創)이 주변에 설치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의 번성함과 활기가 전해진다.

37번 도로는 역말을 뒤로 한 채 옛 조종현(朝宗縣)의 현창으로 이어진다.

하면은 옛 조종현의 관청소재지로 고려 현종 9년대부터 붙여진 이름이 지금껏 불리고 있다.

▲ 37번 도로와 함께 유유히 흐르고 있는 조종천.
지금의 현리(縣里)라는 이름 역시 조종현에서 유래한 것이며 조선후기까지 현창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조종현 시절부터 이용해온 가평현의 공식 창고였다. 또한 19세기 중엽 읍지에는 현리에도 여관이 있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후기에 가평군에 하나밖에 없던 제언(저수지)도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현리를 포함한 상·하면은 군사도시로 불리며 포천 일동, 남양주 수동 등의 도로와 연결돼 있다.

37번 도로는 연동역과 하면을 거치면서 조종천의 상류인 십이탄에 이르게 된다. 십이탄은 태봉리부터 율길리사이를 12번 굽이진 여울을 건너는 곳으로 명당이 존재한다는 설이 유래한다.

가평지역에서의 37번 도로 마지막 마을인 율길리는 현재 가평포도의 주산지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으로 예전에는 주민들만이 아닌 조정으로 연락하는 관리들, 또 이곳 군·현으로 부임해 오는 현감이나 군수들을 마중나가 반기는 지역이 바로 율길리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이 곳에 점막(여관)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렇듯 37번 옛길의 마을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예전의 교통로는 각 지방별로 또는 지역별로 교통의 요지에 역을 중심으로 역도(驛道)를 설정해 운영한 것으로 역은 교통로와 더불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37번 도로 또한 이같은 중요한 역할의 소임을 지금까지 충실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예부터 도성과 영서·영동지방을 이어주며 군사적, 행정적, 중요한 교통로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주고 있는 국도 37번도로가 바로 가평의 살아있는 역사로(歷史路)인 것이다.

글·사진┃가평/김민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