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 민간도교 활동은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수입된 민간도교이다. 명(明)으로부터 들여온 권선서(勸善書)와 관제(關帝) 신앙이 조선 후기 내내 크게 유행한 것이 그것이다. 둘째로 '정감록(鄭鑑錄)' 등을 중심으로 한 참위설적 민간도교이다. 도교의 기층적 의의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흐름이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로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고 양반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몰락한 반체제적 사족 계층과 민중들 사이에서 왕조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진단하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점치는 참위설적 도교 사조가 유행하였다.
이 사조는 이후 왕조 통치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민간에 더욱 퍼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홍경래 난과 같은 반란 운동의 배후 이념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반항적 민간도교 사상은 기존 질서의 해체와 재통합을 목표로 하는 민중 종교의 이념에 수용되어 이른바 신종교 현상으로 표출되었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립된 동학, 1901년 강일순에 의해 영도된 증산교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그 이념에 있어서 구세적(救世的)이고 교법에 있어서 주술적인데 이러한 성향은 과거의 태평도 및 오두미도 등 민간도교가 가지고 있었던 특징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도 대륙에서는 리홍즈(李洪志)가 이끄는 도교수련단체인 법륜공이 그 정치성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법륜공은 개방화 이후 사회주의 이념의 쇠퇴,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정신상의 황폐 등 이념적 공백의 상황 속에서 급격히 성장하였다.
수련문화인 법륜공과 국가 권력의 주체인 공산당과의 충돌은 사회주의 정권하에서의 개인성과 사회집단과의 관계, 종교조직의 자율성 등 여러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어쨌든 태평천국(太平天國) 이래 최대 규모 종교조직의 공권력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반정권적 성향의 유래를 지닌 대중적 도교조직이라는 점에서 자못 귀추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도교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탐색해 보면 은(殷) 및 동이계 신화까지 소급된다. 이들 신화는 주대(周代) 이후 억압, 잠복되었다가 도교로 전화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도교의 주변적·이단적·기층적 성향은 출발부터 내재해 온 생래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살펴 본 바 도교의 이러한 성향은 역사적으로 정치·사회·문화 제 측면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왔다. 우리는 도교가 동아시아의 역사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지배이념에 대해 상대적이고 보완적 위치에 서서 비판과 승화의 기능을 수행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도교도 특정한 역사시기에 왕권과 결탁하여 지배계층을 비호하고 정치상의 부작용을 낳은 적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도교는 비주류의 편에서 경직된 주류의 논리에 활력과 다양성을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해 왔다. 넓은 의미에서 '기층문화로서의 도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설정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거에 이어 근대 이후의 도교는 어떠한가? 일찍이 노신은 도교를 '중국의 뿌리'라고 지칭했지만 사실 이 말 속에는 근대 지향의 과정에서 비판해야 할 근원적 대상이라는 함의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근대 이후 도교는 유교가 전근대적 봉건의식의 산실로 매도되는 동안에 마찬가지로 비과학과 미신의 온상으로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신앙적인 방면에서 도교는 중국 대륙의 경우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 이후 탄압을 받아 거의 소멸 상태에 있다가 개혁 개방 이후 빠른 속도로 소생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홍콩 및 동남아시아 화교 거주 지역에서는 민간 종교로서 여전히 광범위하게 신앙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인 교단이 존재하고 있으며 도사도 활동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홍콩이나 대만의 수많은 상점이나 식당 등의 입구에는 도교의 재물신을 모신 재단이 놓여 있다. 이를 통해 홍콩과 대만 중국인들의 도교의 신앙심 정도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조선 말기까지도 성행했던 민간도교는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이 동학·증산교 등 신종교로 통합되었고 오늘날에는 불교·민속 등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가령 불교 사찰 내에 안치된 칠성신·산신 등이 모셔진 칠성각과 향촌에서 모셔지는 조왕신·성황신 등의 존재가 그것이다. 오늘의 도교가 실제 신앙적인 차원에서 근대 이후의 부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도교의 본질, 문화 가치 등에 대한 학술적 탐색은 상당한 집적이 있고 활기를 띠고 있다.
일본 및 유럽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도교에 대한 연구가 종래의 종교학·철학·문학 위주를 벗어나 의학·과학사·심리학·사회학·고고학·민속학·신화학 등 다방면과 관련을 맺는 학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 도교라는 단일한 지역 문화의 개념을 넘어 동아시아 문화라는 큰 단위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대륙에서는 문화혁명이 끝난 직후 1980년대부터 이른바 '문화열(文化熱)'로 인한 복고 추세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도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 국가적 지원에 따른 연구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연구 경향은 아무래도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민간문화로서의 의의, 과학사적 가치, 사회·경제사적 의미 등을 재발견하는 데에 치중되어 있다.
이미 서구에서 맹위를 떨쳤던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신사조가 유입되면서 학자들은 데리다, 푸코 등의 해체론적 관념과 도교의 반가치적 사유체계가 합치함에 주목하게 되었다. 비교철학 방면의 많은 논의들은 도교를 이제 포스트모던한 사유의 선구로서 평가하기도 한다.
아울러 도교의 여성주의적 성향은 페미니즘에서, 자연과의 합일 관념은 생태학에서, 신체성에 대한 강조는 몸에 관한 담론 영역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그 현대적 적용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등 바야흐로 기층문화로서의 도교가 지니고 있던 문화내용들이 오늘날 전면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일단 도교가치의 이러한 복권을 환영하지만 화려한 재등장의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존재를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후기 구조주의 등과 도교와의 유사성 비교는 본질적인 친연성, 낭만주의 시대 이후의 문화교류 등의 요인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서구의 자기반성으로부터 비롯한 반사적 조명의 혐의가 없지 않다. 이러한 반사적 조명은 대상을 위해 쉽게 '레토릭'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완벽한 이미지로 재현해 내려는 경향이 있다. 도교가 그렇게 완벽했던가? 과거 가치의 복권이 과거 도교의 완벽성을 승인해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층문화로서의 도교가 이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의식의 생산자로서가 아니고 소비자의 위치에 있을 때 도교는 한 시대의 문화 상품으로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치를 지닐 뿐 진정한 복권을 이루어 낼 수 없다. 진정한 복권이란 어느 날 감춰 두었던 골동품을 꺼내어 진열하듯이 새삼스럽게 도교의 문화가치를 거론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기한 문제의식에 의해 철저히 도교를 다시금 해석하여 찌꺼기를 걸러내고 그 본질을 재정의하는 데에 있다. 이 시대 우리의 도교에 대한 열망이 혹시나 밖으로부터 주어진 '희망'의 소산은 아닌지 냉정히 심문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교는 여전히 일반인에게 많이 곡해되어 허황되거나 미신적인 것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이는 도사와 신선 등 도교의 신앙과 상징부호들을 심하게 과장해 초현실적이고 황당한 이미지로 그려낸 일부 문학과 대중매체의 탓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도교 자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미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삼교의 하나로서의 도교가 유교, 불교와 함께 한국과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도교문화의 깊고도 넓은 영향력을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신진식 인천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
